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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28. 2022

잘 가, 나의 겨울

러시아 | 블린니 

겨울이 긴 러시아는 봄을 맞는 특별한 기간이 있다. 마슬레니짜, 봄맞이 축제다. 러시아 정교회의 달력에 따라 부활절을 기준으로 축제가 시작되는 날짜는 매해 바뀐다. 2021년의 마슬레니짜는 3월 8일부터 14일로 이 축제가 끝나면, 40일의 사순절 기간을 보낸 후 부활절을 맞는다.     


굳이 달력을 확인하지 않아도, 마슬레니짜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 이 축제를 앞둔 슈퍼마켓에선 특별 매대가 열린다. 메밀가루, 밀가루, 베이킹소다, 해바라기씨 오일, 꿀, 우유, 버터가 한가득 모여있다. 이 축제 기간에 먹는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린을 위한 재료들이었다.      


“저 여자아이 풍선은 뭘까?” 

“마슬레니짜라고 불러. 원래 지푸라기 인형으로 만드는데 축제의 마지막 날 태우는 거야. 겨울아, 잘 가-라고 인사하는 거지.”      


러시아어학교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시베리아의 이발사, 19980>을 틀었다. 설원의 러시아 풍경이 아름다운 영화 속엔 마슬레니짜 축제의 현장도 나온다. 눈이 쌓여있는 광장에 모인 이들은 블린을 먹고, 남성들은 편을 갈라 주먹다짐을 한다. 두 편으로 나뉘는 이들은 겨울과 봄을 상징하는데, 결과는 늘 봄이 이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승패의 의미보다 긴 겨울 내 움츠려있던 몸을 깨우고 움직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선생님은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왜 많은 음식 중 블린니일까?      


“이 동그란 모양이 태양을 닮아서 그래. 따뜻한 봄을 맞이하는 거야.”      


동그란 태양을 닮은 블린니 


카페에서 만난 러시아인 친구가 접혀있던 블린니를 펼쳤다. 평소에도 즐겨 먹지만, 마슬레니짜 기간의 카페는 블린니 특별 메뉴판을 따로 준비하기도 한다. 익숙한 도톰한 팬케이크와 달리 얇은 크레페에 더 가까운 블린, 러시아에서는 이 블린에 스메타나(러시아식 샤워크림), 캐비어, 잼을 곁들인다. ‘블린니가 없으면 마슬레니짜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운 좋게도 친구가 기획한 요리수업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러시아인 요리사, 올렉이 블린니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블린니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서두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는 예열된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인 후 국자로 반죽을 떠서 골고루 펼쳤다. 한국의 부침개를 만드는 것처럼, ‘저건, 할 수 있겠어! 뒤집는 게 어려울 거 같은데...’ 그는 뒤집개 대신 얇고 긴 나무꼬지를 손에 들었다.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프라이팬에서 떼어내세요. 버터도 적당히 넣어주고요.”      


마슬레니짜의 어원이 마슬로(버터)에서 왔다고 하더니, 블린니엔 버터가 듬뿍 들어간다. 얇게 구워진 블린을 한 장 접시에 올리고, 그 위에 작은 버터 한 조각, 또 블린 한 장, 작은 버터 한 조각을 올린다. 온기가 남아있는 블린은 서로 붙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두터운 패딩을 벗지 못했지만 눈앞에 따뜻한 태양을 닮은 동그란 블린이 향기로운 봄 인사를 건넨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맞은 첫겨울, 햇살 없는 하루, 홀로 멈춰진 시계처럼 느껴졌던 나날들, 울적했던 긴 겨울이 떠나려 한다. 왠지 아쉬웠다. 가장 추웠던 겨울을 나고 맞는 봄은 이전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겠지. 아직 온기가 남은 블린을 입에 넣으며, 힘들었던 나의 겨울과 인사를 나눈다.      


“잘 가, 나의 겨울. 다음엔 더 친하게 지내자.” 


Moscow, Russia _겨울을 떠나 보내며, 봄을 맞이하는 블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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