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너는 좋은 사람이야

누군가에게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날

by 불가사리

그녀가 열쇠로 문을 열자, 사진으로 보던 집의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의 중간엔 미닫이문이 있어 두 개의 방처럼 나눠 쓸 수 있다. 그녀의 손가락이 오른편을 가리켰다.


“이쪽 방을 쓰면 돼요. 근데 난방기는 제 방에만 있어서, 제가 잘 때 미닫이문을 살짝 열어두면 그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가니까 괜찮으실 거예요. 아, 혹시 텔레비전도 제 방에 있으니까, 보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난방기, 텔레비전, 붙박이장은 모두 그녀의 방에, 내 방에는 옷을 걸 수 있는 행거 하나뿐이다. 그제야 후회했다. ‘아, 집을 인터넷으로 구하는 게 아닌데. 3개월만 지내면 되니까!’ 1월 3일, 도쿄에서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했다. 바깥보다 실내가 더 추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집에서 나는 깨달았다. 매일 밤늦게까지 켜진 텔레비전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일본인 집주인에게 월세를 내는 세입자인 유학생의 또 다른 세입자. 전기세와 수도세도 반반. 졸업반인 그녀는 주로 집에 있었고, 대부분의 가전제품은 그녀의 방에 있다. 시작부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hoto-1554094942-929fd0de733f.jpg?type=w966 © nina1795, 출처 Unsplash



워킹이 있어야 홀리데이가 있는 법이다. 수많은 면접 끝에 미타카 역 앞의 KFC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최저시급이 한국보다 비싼 일본엔 시간제로 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을 프리타(フリーター : 프리(Free)와 아르바이트(Arbeit)를 합친 표현)라고 부른다. 평일 낮엔 프리타인 엄마 또래의 분들이 있었지만, 저녁이나 주말은 대부분 중, 고등학생이 선배가 되어 내게 일을 가르쳤다. 그중 가장 무서운 동료는 16살의 킨키라는 여학생이었다.


“이(李)상,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요. 알겠어요? 내가 몇 번이나 말해요?”


검은색 아이라이너로 눈매 끝을 살짝 올린 그녀의 눈이 목소리와 묘하게 어울렸다. 말끝마다 “와카루(알겠어?)”를 덧붙이는데 뒤로 가서 한대 콩-하고 머리를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일본어가 짧은 나를 배려해서 일의 시범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도 있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로만 설명했다. 우리는 자주 파트너가 됐다.


photo-1511465112067-19658af1f11e.jpg?type=w966 © jezael, 출처 Unsplash


집에 오면 말은 들려도,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 한국인 룸메이트, 일터에 가면 말이 들리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버겁고 힘에 부쳤다. 일터에서 아는 태국인 친구가 물었다.


“언니-(한국말), 무슨 일 있어요?


그제야 속내를 말했다. 한국인 룸메이트와의 어려움을 들은 친구는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했다. 정 머물 곳이 없으면 자기네 집으로 오라며, 남은 월세는 내고 오면 되지 않냐는 것이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나가려고 했는데, 월세가 이중으로 들더라도 그게 마음이 편하겠다 싶었다. 셰어하우스를 알아보고 이사를 준비했다. 다음 달 월세와 편지를 써서 방에 두고 그 집을 나왔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한 달 반의 시간이 있으니, 그녀도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하기엔 충분하리라 믿었다. 그 후. 그녀는 내게 한동안 일본어로 욕이 잔뜩 적힌 문자를 보냈다. 답할 이유는 없었다.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녀는 유학생 모임 사이트에서 3개월마다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했다. 계약 연장이 아닌 떠남을 택한 그녀의 전 룸메이트들의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photo-1525230071276-4a87f42f469e.jpg?type=w966 © agathemarty, 출처 Unsplash


반년의 시간이 지났다. 주방에서 닭을 튀기던 나는 종종 카운터에서 주문도 받았다. 어느 날 카운터에 있던 내게 점장이 오면서 말했다.


“이(李)상, 너한테 착불로 소포가 하나 왔어.”

“소포요? 저한테요? 여기 주소로 보낼 사람이 없는데?”

“착불로 와서 일단 내가 냈어. 사무실에 뒀으니까 나중에 확인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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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영업이 끝난 밤 10시에야 내 앞으로 온 소포를 확인했다. 보낸 이는 처음 보는 일본인 이름이었다. 조심스레 박스를 열었고, 그 사이로 보인 내용물에 나는 이 소포의 진짜 보낸 이를 알았다. 함께 살던 한국인 룸메이트였다. 그녀는 내가 그 집을 떠나면서, 다음 주 지정 요일에 버려주길 부탁한 재활용 쓰레기에 자신의 쓰레기를 더해 내게 착불로 소포를 부친 것이다. 도대체 왜? 반년이 지나서야? 나는 소포 상자를 바로 닫았다. 이상한 기운을 눈치챈 점장이 물었다.


“이(李)상, 너한테 온 거 맞니?”

“네. 제 앞으로 온 게 맞긴 하는데...”


일본인인 그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구구절절 말해봤자 같은 한국인을 욕하는 것밖에 더 되나 싶어 꾹 참았다. 그는 반갑지 않은 소포인 것을 눈치챘다. 나는 그가 지불한 착불 소포 비용을 지갑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점장, 여기...”

“이(李)상, 안 받을게. 잘못 온 소포잖아. 네 이름만 보고 확인 없이 받아버린 내 실수야. 그리고 그 소포 버려도 되는 거면 여기 두고 가. 여기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가게 앞에 두자.”

“고맙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내가 아는 너는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그 말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까지 살면서 누군가의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쓰레기 소포’를 받고 나니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같은 한국인은 일본인 가명을 써서 더러운 쓰레기를 소포로 보냈지만, 이를 받은 일본인 점장은 배려의 말들로 더러워진 내 마음을 깨끗하게 쓸어주었다. 그 후로 가끔 도쿄에 가면, 미타카 역 앞 KFC에 들렀다. 왠지 그곳에 가면 ‘좋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photo-1586810165699-f4972ac539ff.jpg?type=w1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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