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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14. 2020

칼 같은 업무분장의 나라

휴대폰을 사면서 생긴 일

한국에서부터 쓰던 휴대폰이 계속 말썽이다. 러시아 유심으로 바꿨더니 먹통이 되었다.

“어차피 오래 썼으니까, 여기서 휴대폰 하나 새로 사자.”

남편의 손에 이끌려 전자제품 매장에 갔다. 엠비데오라고 불리는 곳엔 휴대폰부터 청소기, 전자레인지, 텔레비전, 카메라 등 각종 전자제품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러시아에서 외국인인 우리는 신용카드가 아닌 직불카드를 쓴다. 슈퍼에서 장을 보는 소소한 소비부터, 가구를 구입하거나, 휴대폰을 살 때도 큰돈이 통장에서 바로 빠져나간다.

“신제품은 필요 없고, 이 거면 될 거 같아.”
“이왕이면 새로운 걸 사지 그래?”
“이 사이즈면 충분해.”


© drewcoffman, 출처 Unsplash


나는 아이폰 8을 골랐다. 옆에 있던 직원에게 말했더니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새 휴대폰을 들고 올 줄 알았던 그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 한 장을 우리에게 건넸다.

“왜 휴대폰을 안 가져다 준거지?”
“도난 위험이 있어서 창고에 있을 거야. 먼저 계산하러 가자.”

남편은 익숙한 듯 종이를 들고, 계산하는 곳으로 갔다.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받아 또 옆에 있는 코너로 옮겼다. 영수증을 건네니, 다른 직원이 창고에서 휴대폰을 꺼내왔다. 새로운 휴대폰의 유심은 다른 쪽에서 끼웠다. 휴대폰 하나를 사는 데 총 4명의 사람을 거쳤다. 한국이라면, 한 사람이 다 했을 일을 네 사람에 걸쳐 순서를 밟다 보니 시간이 꽤 소요됐다.

“우와. 칼 같은 업무분장이다.”
“일자리 창출이라고 생각해줘.”

나는 한국의 직장을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업무를 분장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영역을 뛰어넘어 일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곳. 나 또한 그곳에서 일하며 ‘내 일, 네 일’을 칼같이 구분 짓는 이를 얄미워했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속도와 시스템이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융통성이 없고, 효율적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문득 한국의 러시아 학원에서 선생님이 이야기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석사논문을 받기 위해 1부터 10까지 문서가 필요해요. 한국이라면 모든 문서를 검토한 후 3, 5, 7번 보충해와. 그러죠. 하지만 러시아라면 다르죠. 1번부터 차례대로 보다가 3번에서 막혀요. 3번 문서 다시 보충해와. 그래서 준비해 가면 다시 또 5번에서 걸리죠. 이런 일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요. 그게 러시아라는 나라입니다.”

에따라씨아. (이것이 러시아다) 수년간 한국에서 자라면서 내가 믿어온 ‘당연함’ 은, 이 곳에서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된다. 내가 배운 ‘속도’의 타당성 은 이 곳의 시계와 맞지 않았다. 효율성은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하자.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이 곳의 속도와 생각을 천천히 배워야 한다. 러시아어뿐 아니라,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를 알아가고 배우는 열린 수업이 내 생활 전반에서 시작됐다.


각종 전자제품을 파는, 러시아의 엠비데오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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