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화이트 크리스마스’

겨울왕국 러시아의 12월 풍경

by 불가사리

“러시아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말이 없어”
“어머, 정말?”
“겨울엔 계속 눈이 오니까, 크리스마스에 눈은 당연한 거지”

매해 12월이 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길 오랫동안 바랐다. 모스크바에서 맞는 첫 번째 겨울, 남편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눈이 없는 여름의 크리스마스도 있지만, 겨울이 되면 눈이 숨 쉬는 공기처럼 흔한 나라. 10월 마지막 주에 첫눈이 내리더니, 12월에 접어들면서 매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랄 것도 없이 ‘당연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다.


호수의 오리들이 모두 눈 밭을 거닐 던 12월의 어느 날


겨울에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눈이 좋았다. 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 중 선택한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추운 나라’를 택했다. 무덥고 습한 여름의 기운보다, 차갑고 서늘한 겨울이 더 잘 맞았다. 일단 겨울의 아이템이 너무 예쁘지 않은가!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 도톰한 코트를 걸친 후 목도리를 칭칭 감고, 손에는 벙어리장갑을 끼고 밖에 나간다. 코 끝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답답했던 마음도 뚫리고, 잠들어 있던 정신도 바짝 깨었다. 겨울의 모스크바는 매일이 새로웠다.


“러시아에는 산타클로스가 없어요.”

“헉- 그럼 크리스마스도 없나요?”

“러시아는 새해를 기념한답니다. 산타클로스 대신 데드 마로스(겨울 할아버지-추운 기운을 가져오는 할아버지)와 스네그루치카(눈소녀)가 있죠.”


러시아어학교의 송년음악회, 데드마로스(겨울할아버지)와 스네그루치카(눈소녀)의 등장
슈퍼마켓에서 발견한 킨더 초콜릿, 러시아 스타일의 데드마로스와 스네그루치카


어학교의 러시아인 선생님은 우리에게 러시아의 성탄절을 설명했다. 러시아에서는 빨간 코의 루돌프가 아닌 눈 소녀, 러시아의 산타클로스 ‘겨울 할아버지’ 곁엔 늘 ‘눈 소녀’가 함께한다. ‘욜카’라는 시리즈의 영화를 보며, 아이가 트리 앞에서 소원을 빌고 편지를 쓰는 대상도 ‘데드 마로스’며, 아이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은 ‘새해’였다. 러시아인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아닌, 새해의 기적과 소원을 꿈꾸며 12월 한 달을 보낸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닌 1월 7일이다. 러시아 정교의 율리우스력(태음력)을 따라 +13일이 늦다. 당연히 12월 25일은 국가지정 공휴일이 아니며, 1월 1일부터 러시아의 성탄절 다음날 (1/8)까지 긴 새해 연휴가 이어진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 보다 ‘해피 뉴 이어-스노비고 돔’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나라, 12월부터 새해를 기다리는 ‘욜카(트리)’ 가 시내 곳곳에 설치되며, 화려한 겨울의 축제가 거리에서 열린다.


붉은 광장에 설치된 트리 중 하나 :) 추운 밤을 밝히는 모스크바의 욜카(트리)들


“붉은 광장에 가자, 트리가 설치되었을 거야.”
“이번에는 작년보다 더 크게 하는 것 같아.”

주말을 맞아 일찌감치 시내로 간다.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거리 곳곳에 화려한 장식, 밝은 전구를 단 트리들이 모스크바의 밤을 밝힌다. 밝게 빛나며 돌아가는 밤의 회전목마를 탄 아이들이 즐거워 보인다. ‘크리스마스로의 여행 (2019)’라는 콘셉트에 맞춰 각 지역으로 떠나는 푯말이 붙어 있다. 그 나라의 특색 있는 음식도 함께 판다. 프라하라고 쓰인 곳에서 유명한 굴뚝 빵을 만날 수 있었다. 옛 러시아의 전통의상을 입은 이들의 노랫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붉은 광장에서 열린 모스크바의 겨울축제, 크리스마스로의 여행(2019)


“땅이 넓어서 그런가, 정말 어마 어마 하다.”
“온 마음으로 새해의 좋은 기운을 기다리는 것 같지?”




어학교의 수업은 12월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미 한국의 대학교라면 종강을 했을 텐데, 겨울의 수업은 길고 길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창틀 선반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긁었다. 쓱쓱- 싹싹- 눈을 한 움큼 뭉쳐 단단한 몸통과 얼굴, 교실에 굴러다니던 압정, 클립으로 눈과 코, 팔을 만든다. 햇빛이 없고 길고 추운 겨울 왕국의 눈사람은 다음 날에도, 주말을 보낸 후에도 녹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도 눈사람이랑 같이 새해를 맞이하겠어.”

‘스 노비 고돔’

우리도 새해를 기다린다. 엄밀히 말하면 길고 긴 방학을 기다리며, 오늘도 창틀의 눈사람과 함께 러시아어 수업을 듣는다.


길고 추운 12월의 겨울, 녹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는 눈사람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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