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의 추억
“눈이 오면 모두 혓바닥을 내밀었어. 그 눈을 맞으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믿었거든!”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하니, 러시아에서는 나뭇잎 대신 눈이라며 친구 안나가 말했다. 빠르면 11월부터 눈이 오는, 긴 겨울의 나라에서는 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한 겨울에 내리는 눈은 소복하게 쌓여 하얗고 예쁘지만, 봄이 가까울수록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는 눈은 안 예뻐, 거리도 신발도 더러워지니까.”라고 말했던 러시아어 선생님의 새해 계획은 모스크바를 벗어나, 깨끗하고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며 차를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겨울이면 늘 있는 눈이기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곳, 늘 겨울이면 길바닥의 무늬도 색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하얀 눈이 카펫처럼 깔렸는데 이번은 달랐다. 처음으로 눈 없는 크리스마스, 140년 만의 가장 따뜻한 겨울이라고 했다. 시베리아의 한 러시아인이 “자연 눈을 팝니다. 모스크바 주민들에게 특별 할인!”이라는 게시물을 올릴 정도로, 이 곳의 겨울은 한국보다 따뜻한 날이 계속되고 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창 밖에서 소리가 났다.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포클레인이 움직이는 소리, 모스크바에서 보낸 첫겨울이 그랬다. 소리의 정체는 눈을 쓸어 담는 작은 포클레인. 겨울이 오면 매일 밤 그 소리가 나는 듯한 환청에 시달렸다.
“여보, 눈이 오나 봐. 눈 치우는 차 소리 들리지?”
“그런가, 커튼 걷어보자!”
하지만 결과는 그냥 거센 바람 소리, 눈 없는 겨울이 계속되고 이런 대화를 반복하기 며칠 째 되던 지난 주말 아침, 일찍 눈을 뜬 나는 또 그 소리를 들었고, 침대에서 살금살금 내려 커튼을 열었다. 눈이다! 밤새 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예쁜 함박눈이 창틀에 쌓이는 것을 한 참을 바라보았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다도라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빠의 발령에 따라 이사가 잦은 편이었다. 유독 그 마을, 그 시간의 기억이 선명하다. 깊은 산골이었고, 큰 슈퍼도 없었다. 학교 관사에 살았는데, 이웃집은 아빠의 동료 교사의 자녀는 내 또래의 친구였다. 분교였으니 학생도 많이 없었고, 우리는 매일 등하교를 같이하며 단짝처럼 지냈다. 그곳의 겨울은 늘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는 날, 우리는 눈 사탕 가게를 열었다. 내가 먼저 가방에서 책받침을 꺼내 소복하게 눈을 담아왔다.
“살짝 꼭 눌러봐, 으스러지면 안 돼.”
“자~ 누른다.”
친구는 자신의 책받침으로 소복하게 쌓인 눈을 꼭 눌렀다. 하얀 눈송이들은 서로 얼기설기 뭉쳐졌다. 두툼한 네모 모양의 눈 사탕이 되었다. 엄마의 눈을 피해 가져온 과도로 조금씩 잘랐다. 칼이 없으면 긴 자로도 나눌 수 있었다. 보드랍고 차가운 뭉쳐져 있는 솜사탕 같은 눈 사탕, 단 맛도 신 맛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맛이 있었다. 수년 전의 눈은 지금과 달리 아마도 더 깨끗해서였을까.
여전히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며 그 날을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눈 솜사탕이 나무 곳곳에 붙어있다. 남편과 함께 나간 집 앞 공원의 산책 길, 소복하게 쌓인 눈을 한 손으로 꼭 쓸어본다. 아이스크림의 콘처럼 주먹을 쥔 손에 살짝 얹는다. 지금 맛을 보면 그때 그 맛이 날까? 그때 그 눈의 맛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