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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Jun 17. 2024

6. 희망에 속아서Ⅰ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6. 희망에 속아서



  카페 매장으로 만들고 있는 한옥 본채는 마감까지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멋있고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내가 또 망하게 되어도 내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다 뜯어 치우고, 주워다 놓은 것들을 싸다 버리고 떠나기만 하면 되게끔 나는 이 건물의 원형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나만 깨끗하게 나가면 이 건축물은 내 흔적 없이 원래의 상태로 고스란히 돌아와 다른 누군가가 더 나은 용도로 쓸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균열이 가고 삭아서 부서지고 무너진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더 오래 남을 가능성이 있으리라.

  돈이 너무 많아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교외 등지에 아예 카페 용도로 기이하게 생긴 대형 건물을 지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카페가 잘 되는 데가 많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건축비라도 메꿀 수 있을 것인가? 그 같은 대형 카페가 망하고 나면 그 건물은 식당으로도 맞지 않고 온통 유리로 발라놓아 창고로라도 못 쓰게끔 보였다. 돈은 돈 대로 날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흉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네들은 생각하면서 사는 것일까?  


  보통 인간의 생애란 희망에 속아서 죽음의 팔에 뛰어든다는 것일 뿐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


  아예 돈 없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매장 출입문 옆벽에 조그맣게라도 간판은 달아야 했다. 나는 유유하게 체공하고 있는 매의 형상이 들어가게끔 해서 하나를 주문하기로 했다. 

  지난날 내 사업이 간판이 커서 성공한 적은 없었다. 나는 큰돈을 들여 간판을 커다랗게 해놓고 몇 번이나 새로 하면서도 희망에 취해 돈 아까운 줄을 몰랐다. 이제 와보면 너무나 아깝다. 잘 될지, 안될지도 모르고 간판만 엄청 크게 해놓고 망하는 곳을 한두 군데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는 간판을 조그맣게 하기로 했다. 하나의 실험이었다.   




  몸뚱이를 팔러 새벽같이 나가야 하는 것은 항상 그랬지만 끔찍한 일이었다. 간판값이며 작업에 드는 여타 재료를 사야 할 일이 생겼기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나는 일단 5일간 인력사무소에 나갔고, 다섯째 날의 반으로 접힌 채 땀으로 젖어 붙어버린 돈은 아내에게 건네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거를 왜 날 줘요?”

  “……미안해서. 당신 써.”  

  그전에 인터넷으로 LED 간판을 찾아보았더니 훨씬 쌌지만, 그래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에 작업을 마치고 나야 돈을 주고 말고 하는 것이 원래의 내 방식인지라 아무래도 시내에서 맞추는 것이 나았다. 예전부터 거래하던 간판 집에서 가로세로 55cm짜리 정사각형으로 주문했는데 매의 이미지는 인터넷에 있는 사진 중에 대충 하나 대충 골라서 그 집의 디자인하는 종업원에게 넘겼다. 이것은 예전의 내 방법이 아니었는데, 망해버린 내 사업체들의 로고들은 고심, 고심하며 심혈까지 기울여 도안하고 했었던 때문이다. 지금 와서는 그런 것이 그다지 의미 없었다.

  간판에 붙일 상호는 ‘Cafe 문학적인 숲’으로 정했다. 그것도 그냥 평소 내 말버릇에서 기인했다. 무엇이 ‘문학적이다’라는 말은 내 입에서 나오는 최대의 찬사였다. 이를테면

  “저쪽에 걸어가고 있는 여자, 문학적인 모습이지 않냐?”

  “문학적인 날씨다.”

  “그건 문학적이지 않아.”

  “문학적인 소양이라곤 없어가지고.”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래, 겨우 카페 상호 같은 것? 나는 반쯤은 장난삼아지었다. ‘Cafe 문학적인 숲’이면 어떻고, ‘Cafe 문학의 숲’이면 또 어떠며, 아예 ‘Cafe 문학’이면 또 어떤가.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문학적이지 않으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문학은 인생 자체를 다루는 예술이다. 짧은 인생을 비문학적으로만 살 것이냐. 




  카페를 만든다고 대부분을 한 군데만 있었으니 잠시 기억을 따라 다른 곳으로 멀리, 한 번 나가보도록 하자. 승마장 일을 할 때였을 것이다. 쉬는 날 멀리까지 다녀오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전에 한 적이 있다. 도의 경계를 넘고서도 한참 후, 그 길로 갈 계획은 아니었지만 무심코 운전하다가 몇 번 접어들게 된 그 좁다란 지방 도로 옆 어디쯤에는 푸른색 슬레이트 지붕을 인 궁색해 보이는 작고 허연 집이 외따로 서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 집은 지붕과 같은 색깔의 철 대문이 꼭 닫아 놓았고 인기척이 없어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왠지 그 시골집 앞에서는 매번 어떤 향수에 젖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집은 내가 우연히 몇 번 그 길로 들어서서 보았을 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가 전혀 모르는, 길가의 시골 가옥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집은 나를 상상에 빠지게 하는 알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랬다. 나는 그 집 앞에서 상상했다. 그저 빈한함이 묻어나는 외딴 시골집 하나가 내게는 가슴 저릿하게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남게 되는 상상을 나는 했던 것이다. 

  그 초라한 시골집에 젊은 날의 내 여자가 살고 있다고 나는 상상했다. 그녀의 늙고 완고한 부친은 도무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의 허락을 득하지 못했고 그 집의 퍼런 대문 앞에서 몇 시간째 서성거린다. 나는 안쪽 어딘가에 있을, 아마도 말간 손을 찬물에 적시고 있을 애처로운 그녀를 애달프게 그린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기다린다. 내 여자가 사는 집! 세상에 이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집은 없다. 

  그리고 다시 얼마 뒤에 한 번, 그 뒤에 또 한 번 나는 그 아름다운 집 앞에서 내려 담배를 붙여 물고 다시금 가슴 저릿함을 맛보았던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 집 말고도 아무 집으로라도, 심지어 허물어져 가는 집일지라도 나 같은 식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집은 다르게 보일 터이다. 이러한 것이 문학적으로 보는 일례다. 






〈희망에 속아서Ⅱ〉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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