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의사는 병실을 나갔다. 민희는 평소와 달리 긴장이 풀려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늘 긴장감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힘들게 살았다. 일을 할 때는 당연하지만 그것 외에도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항상 신경 썼다. 팀 회식 때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중요한 회식자리만 참여했다. 하지만 일 특성상 외부 접대가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있을 경우에는 최선을 다해 자리에 임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긴장감은 숨기지 못했기에 민희는 중요한 외부 접대 자리는 그녀를 빼고 진행했다. 회사에서는 대인 관계를 꺼려하는 그녀가 난감했지만 능력 좋고 일 잘했기에 큰 문제를 삼지 않았다.
병실에 입원한 지 며칠 안됐지만 사무실보다 마음이 편했다. 앞이 안 보인다는 큰 불편이 있지만 여기서는 긴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에 대한 경계를 조금 풀었나 보다. 낯선 남자와 스스럼없이 말을 섞으니 말이다. 그녀가 중학교 이후로 낯선 남자와 스스럼없이 말을 섞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그녀가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그건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문성식 팀장이다.
「똑똑똑」
누군가 그녀의 병실 문을 노크했다. 자신을 찾아올 이가 없기에 민희는 의아했다.
민희는 누군가 찾아온 게 귀찮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노크 소리가 나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아마 병실에 그녀가 있는지 확인 차 열었을 것이다.
「누구시죠!」
그녀는 병실 주인의 허락 없이 문을 연 침입자를 경계하듯 말했다.
「답이 없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죠. 목소리 알아보시겠어요?」 민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다.
「김은혜입니다. 문 팀장 와이프」 은혜는 차분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민희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에 놀랐다.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기는 글렀다는 걸 알고 빨리 그녀를 보내고 싶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죠?」 민희는 차갑게 말했다.
「회사에 물어봤지요.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시던데요. 눈이 안 보인다는 것까지..」 은혜는 민희의 차가운 말투에도 아랑 곳 하지 않았다.
「아.. 형사님도 우리 집에 와서 알려주더군요. 당신이 왜 여기에 누워있게 됐는지.. 그이가 차가 당신을 치고 뺑소니쳤다고...」
「대신 사과라도 하려고 온건 가요?」 여전히 민희는 은혜에게 적대적이었다.
「사과? 그걸 왜 내가 하지? 사고를 낸 건 내가 아닌데. 우리 그이가 사라진 것에 대해 혹시라도 알고 있는 게 있나 알아보러 왔지. 우리 그이 어디 있어! 어디로 빼돌린 거야!」 은혜는 갑자기 돌변했다
「아니 나를 치고 도망 간 사람을 왜 나한테 찾는 거죠?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 누워있고 누구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데..」
민희는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너 때문에 사라진 거야 너 때문에.....!!」
은혜는 민희에게 악을 썼다.
「부르셨어요?」
민희의 호출을 듣고 온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사람 모르는 사람이에요. 어서 내보네 주세요.」
「모르는 사람? 허. 어딜 날 쫓아내려고 그래! 난 이대로 못가..」 은혜는 점점 흥분했다.
간호사는 다른 간호사를 불러 은혜를 병실 밖으로 끌어냈다. 문이 닫히고 난 후에도 한참 밖은 시끄러웠다.
민희는 잠시나마 평온을 즐기던 자신을 비웃었다. ‘내 주제에 무슨 안락함이야 안락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