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sight21

by Bullee

민희는 잠에서 깼다. 매일 반복되는 아침이건만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피곤함이었다. 어젯밤 민희는 평소에 비해 말을 많이 했다. 어제 받은 충격으로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훌륭한 상담자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희는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겐 못 했던 이야기들을 민혁에게 털어놨다. 민희는 기분은 좋았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낯선 사람에게 자기 몸을 보여준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부끄러운 감정도 오랜만이었다. 어제 이야기를 털어놓은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다. 민희는 어제 낯선 경험을 했다. 이야기에는 가속도가 있다. 그렇기에 한번 시작하면 조금씩 그 양이 늘어난다. 민희에게도 법칙은 그대로 적용됐다. 조금씩 이야기를 꺼내 놓았는데 어느덧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민혁은 조금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다. 민희는 그에게 조금 기대긴 했지만, 자신의 영역에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영역으로 남자를 끌어들이다 어떻게 됐는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지금 병원에 누워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자기 방어일 뿐 이미 그를 그녀 영역에 상당히 많은 영역을 이미 내어준 것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어제 자신도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혹시라도 해서는 안될 말을 했는지 확인 차 그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난 그를 사랑하진 않았어요.」

민희의 이야기는 문성식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성식과는 이제 아무런 사이가 아닌 걸 강조하고 싶었다. 민희는 당장이라도 어제 자신이 한 이야기를 지우고 싶었지만 이미 내뱉어 그의 귀로 들어간 말은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가요? 애정 없이도 연애를 할 수 있는 거군요.」

그는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와 성식의 관계에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헤어지자고 하고 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은 병원 신세네요.」

「뭐. 사랑하지 않은 연애의 끝 치고는 양호한 거 아닌가요?」

「뺑소니 피해자가 될 만큼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순서가 조금 바뀐 것뿐이에요. 사랑해서 사귀고 그러다 시간이 흘러 애정이 식는 것만이 정석은 아니에요. 애정 없이 사귀다 애정이 생길 수도, 전혀 안 생길 수도 있는 거예요.」

「아 제가 좀 구식이라서」

「근데 웃긴 건 사귈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헤어지고 나니 많은 일이 일어났죠. 남자는 집착하지, 남자의 부인은 어떻게 알았는지 사진까지 들고 와서는...... 뭐. 아시겠죠?」

「음.. 드라마처럼 머리채 잡고서 뭐 그런 건가요? 물을 얼굴에 붓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허무하게 넘어갔어요. 제가 잘못한 게 없다고 버텼거든요. 그 덕분에 잘 넘기긴 했는데 두고 보자는 협박 같은 이야기를 듣기는 했죠.」

「아 그래서 그런 일들을 형사께 털어놓으려고 했군요.」

「네 부인이 다녀가기 전까지 범인은 문성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요. 사실 전 문성식이 사라진 게 부인이 꾸민 게 아닌 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문성식이 나타난 걸 보니 두 사람이 꾸민 것 같기도 하고. 제가 탐정은 아니니 다 제가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기에, 형사에게 다 이야기하고 상상을 확인으로 바꾸려고 했죠.」

「굳이 연인 관계였던 것까지 밝혀야 할까요? 게다가 문성식이 나타난 걸 보니 곧 잡힐 것 같긴 한데.」

「그래서 고민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문성식인지 아셨어요? 향수만 맡고선?」

「그가 쓰는 향수는 독특해요. 그의 체취와 아주 잘 어울리거든요.」

「그런데 그는 왜 온 걸까요」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겠죠.」

「민희 씨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떻게 알고요.」

「그렇네요. 차로 치고 바로 달아났으니 제 생사는 몰랐겠네요. 공범이 있는 거면 부인이랑 같이 절 죽이려고 한 게 맞다는 건가요?」

「혹시 회사 사람이나 다른 곳 의심 가는 사람 없나요?」

「없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

「회사는 아니 세상은 죄다 문성식 편이라고요.」 원래 팀장 자리도 제가 돼야 했는데. 그가 들어오면서 전 또 물을 먹게 됐죠.」

「그럼 둘의 관계는 적과의 동침인 건가요?」

「언제 적 영화 제목인 거죠?.. 구식이시군요.. 상담 전공 안 하길 잘하신 듯」

민희는 평소면 기분 나빴을 대답에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농담 소재로 삼았다.


「뭐 어쩔 수 없죠. 저도 비슷하거든요. 주변 사람들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냥 혼자예요.」

민희는 그의 대답에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쓸쓸한 답변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저란 비슷하네요..」

「혼자라고 생각하는 날이 많군요?」

「늘 혼자라고 생각해요. 내편은 없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고..」

「맞아요.」

민희는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그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해 설명을 구질구질하게 하지 않아도 다 이해해 주는 그가 편했다.

「저도 중학교 때부터인가? 늘 혼자라고 생각했죠.」

「저도.. 중학교....」

「그런데 누가 범인인 것 같아요?」 민희는 중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돌렸다. 민희에게 있어 중학교 시절은 통째로 들어내 자신도 모르는 곳에 묻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전 남자 친구 아닌가요?」

「그렇겠죠?.」

「근데 뭐 누가 범인인 게 중요한가요. 민희 씨가 건강해지는 게 더 중요하죠.」

「혹시 범인이 잡히면 제 눈도 뜨는 거 아닐까요?」

「둘이 전혀 상관이..... 아, 정신적인 문제라면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가 다시 나타날 것 같은 불안함이 안 보이는 원인 중에 하나 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경찰의 업무라서요. 제가 도와드릴 수는 없겠네요. 대신 이야기를 들어드릴 수는 있어요.」

민희는 약간의 설렘을 느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니 언제 경험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 감정 말이다.

「근데 외톨이가 편하지 않아요?」

하지만 민희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아 다시 화제를 돌렸다.

「편하죠 누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관심받지 않아도 되고 전 그게 좋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삶은 혼자 살아도 크게 어렵지 않아요. 다른 사람은 오히려 짐이 될 때가 더 많죠.」

민희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자신과 똑 닮은 그에게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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