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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범근 Jun 06. 2019

우리는 왜 걱정하고 불안할까?

불안의 원인과 불안을 이기는 방법

<불안>이 인상 깊었던 이유

최근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여태까지 인생에서 나 자신과, 그리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조금씩 느끼고 체화해왔던 생각들이 잘 담겨있어서 굉장히 인상 깊었다. 최근에 사업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 때문에 특히나 많이 와 닿았던 것 같다. 


공동창업자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는 많은 불안을 경험했다. 초기 단계의 사업은 (초기 단계가 아니더라도 그럴 거다) 항상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한편으로는 짜릿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고 불안하다. 회사가 부침을 겪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해결해야 할 것 투성이었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다. 밤에도 끊임없이 회사와 관련된 꿈을 꾸었다.  


사업을 하면서 사실 몸이 아픈 적도 없었고, 회사가 실제로 망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여태까지 일해온 것에 비해서) 육체적으로 더 힘들게 일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창업을 하고, 회사를 대표하고, 10명 남짓에게 줄 월급을 마련하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다.  


높은 강도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내가 진지하게 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대해 다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명상을 하면서 내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감정적인 스트레스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으로 얽힌 생각들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금씩 걱정과 불안의 원인을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심리'에 대한 지식에 관심이 많아졌다.  


주변 사람들과도 속마음, 욕망, 감정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제는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비슷비슷한 원인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울만한 조건을 다 갖춘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본성은 비슷하다. 다 걱정과 고민을 안고 산다. 지위나 연령을 가리지 않고 우울증, 공황장애도 흔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생각보다 이 '불안'이라는 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회적 문제일 수 있으며, 정신 건강이라는 게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신경 써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해결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마음에서 오는 고통의 대부분을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픈 이유'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불안, 걱정은 내 평소 의식이 잘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 엉뚱한 원인을 찾는다. 눈에 보이는 외부 환경 (가족, 직장 등)을 탓한다. 아니면 아예 이 고통을 잊으려고 술을 먹거나, 게임에 빠지거나, 단기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다. 다행인 점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의 경우 '내가 무엇 때문에 아픈지',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를 명확히 알기만 해도' 어느 정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진단만 잘해도 치료는 쉬워진다. 다만 그 진단이 어려울 뿐이다. 객관적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마음 와 정신 건강에 대해서 물질적 욕구와 육체적 건강을 강조하는 것만큼 잘 알려지거나 중시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지식'이 중요하다. 불안과 스트레스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일반적으로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비슷한 고민을 겪고 있고,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더 명확하게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나를 넘어서, 타인에 대한 이해도 높아진다. 타인은 겉으로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할 때가 많다. 내 상사는 왜 이렇게 밥맛일까? 내 동생은 왜 이렇게 숨으려고만 할까? 등등. 우리가 인간의 불안과 걱정이 왜 생기는지 이해하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학력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밥맛 동료를 보고, 저 사람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고 거기에 대한 불안이 있어서 저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타인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불안>은 가치 있는 책이다. 현대인들이 가진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준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을 과학적, 학술적으로 해부하진 않는다. 원인들이 논리적으로 구분되고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애초에 마음을 이해하는 데 이성과 과학적 방법론이 좋은 도구는 아닐 수 있다.)


그는 인문학과 스토리텔링을 사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시킨다. 여러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오랜 세월 이전의 철학자들, 역사적 사건 등을 보여주면서 '불안'이라는 것이 인간 본성에서 비롯하는 보편적 현상임을 보여준다.  


사족일 수 있지만, 알랭 드 보통이 <불안>에서 보여주는 문체와 서술 방식은 정말 매력적이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예시와 비유,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보여준다'. 나는 중립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분히 의도적인 이런 서술 방식을 참 좋아한다. 사람들은 '팩트'가 아니라 '이야기'를 좋아한다. 알랭 드 보통이 왜 유명한지 몰랐는데, 이러한 글솜씨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해주는 불안의 원인과 해결책

알랭 드 보통은 책의 '원인' 파트에서 불안의 원인을 들여다본다. 핵심은 '자존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존'이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 '자존감'이다. 이 자존은 생각보다 깨지기 쉽고 연약하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다. 이 '자존'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우울해지고, 불안해하고, 화를 낸다. 


알랭 드 보통은 '자존'을 건드리는 것들을 하나씩 설명해준다. 타인으로부터의 무관심, 속물적인 태도, 낮은 지위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능력주의, 준거집단과의 비교,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세상이 내 연약한 '자존'을 공격한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과 불안을 달고 산다.  


'불안'은 몇천 년 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감정이다. 그래서 여러 시대의,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소크라테스는 "당나귀가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느냐?"라고 말했다. 제인 오스틴은 소설을 통해 속물근성을 비판하고 지위 체계를 비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 사실은 목적을 지닌 이데올로기이며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성찰했다. 톨스토이는 죽음, 모든 것이 끝내는 먼지가 될 것임을 생각했다.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의 지위와 가치관을 거부하고 예술과 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원인과 해결책을 소개한 그는 짧고 담백한 결론을 내놓는다. 그는 지위에 대한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고하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웠다. 그렇게 해서 각 시기마다 지배적인 관념과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패자로 치부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삶에서 성공을 거두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는 여러 가지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존'을 지켜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치 체계는 존재해야 하지만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기준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스스로의 지위를 측정하는 잣대를 만들고,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가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다.  


만약 나를 비난하는 말과 행동, 나보다 잘 나가는 친구들, 강요되는 가치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같은 것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위협한다면, '나는 실패자'라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다면, <불안>을 권해주고 싶다.  


물론 단단한 자존감은 책만 읽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결될 거였으면 불안과 우울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어야겠지.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글쓰기와 명상이었다. 명상은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내 생각과 감정들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non-judgemental)' 보게 해 주었다. 그 전에도 마음 챙김(mindfulness) 명상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사업을 하면서 불안을 크게 겪은 후로는 명상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매일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글쓰기도 컸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감정적으로 힘이 들 때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글을 썼다. 생각과 감정은 완전한 문장으로 나오지 않고, 얼핏 보기엔 말이 안 되는 단어, 사람, 공간에 대한 단상들로 나타난다. 그것들을 쏟아놓았다. 어쩔 때는 쏟아놓기만 했고, 어쩔 때는 쏟아놓은 생각들을 읽어보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리고 그 단상과 감정의 조각들을 이어서 내 머릿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글쓰기나 명상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책에서 밑줄 친 내용들 


    지위로 인한 불안은 우울을 낳는다. (…) 하지만 지위에 대한 갈망은 분명히 쓸모가 있다. 나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만든다.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행동을 억제한다. 공동의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를 결합한다. 하지만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원인>


사랑결핍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따라서 지위가 가져오는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정서적 관점에서도 우리가 지위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자리는 사랑을 얻는 열쇠다.   


속물근성(Snobbery)  

"스파이서 윌콕스 집안사람들이 가네요, 엄마!" 1892년 <펀치>에 실린 만화에서 봄날 아침에 하이드 파크를 걷던 딸은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어머니가 대답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기도 힘들다. 이 병은 애초에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18세기와 19세기의 위대한 정치 혁명과 소비자 혁명은 인류의 물질적 운명을 크게 개선시키는 동시에 심리적 고뇌도 안겨 주었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특별하고 새로운 이상, 즉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는 불평등과 낮은 기대 수준이 정상적이고 지혜로운 것이었다. 극소수만이 부와 만족을 갈망했다. 대다수는 자신이 착취를 당하며 체념 속에 살아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었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1) 더 많은 돈을 주거나 2)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능력주의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좌우된다. 근대에 들어 사람이 왜 가난한지를 설명하는 데 인과응보에 관점이 강력하게 개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은 점차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1989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이 이야기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는 세 가지 메시지를 전달했다. 첫째, 그들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둘째, 세상의 지위는 신이 보기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것. 셋째, 부자는 파렴치하며,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면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   

능력 주의자들은 상당한 불평등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귀족과 생각이 같았으며, 처음 일정 기간에는 기회의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급진적인 평등주의자들과 생각이 같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직업 선택 기회를 가진다면, 수입과 위신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특권은 능력을 따라간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는 능력주의 원리가 승리를 거두었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 부자는 단순히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낮은 지위는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불확실성

    전통 사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어려웠지만, 잃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근대 사회의 지위는 신분보다는 경제 내에서 거두는 성과에 달려있다. 경제의 특성 때문에 지위를 얻으려는 노력은 그 결과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1908년 미국에서는 <3 에이커와 자유>라는 책이 독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저자인 볼턴 홀은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상황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한 뒤, 독자에게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나 미국 중부에서 농지 3 에이커를 적당한 가격에 사라고 권했다. 이 정도 면적이면 4인 가족이 먹고살 만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소박하지만 편안한 집을 유지할 수 있으니, 아첨과 협상으로 동료와 상사와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3 에이커와 자유>는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과 미국 사상에서 점점 자주 들려오게 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위를 부여하는 경제라는 격투장 내에 공존하는 두 가지 요구가 드러난다. 하나는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요구다.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의 삶에서는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 

직장에 대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은 경제의 상승과 하강에 달려있으며, 운과 경쟁에 달려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고,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성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 불어넣는 다섯째 이유가 된다.


<해결책>


철학  

    소크라테스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말인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의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술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 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제인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를 써서 속물근성을 비판한다. 그녀는 자신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서 나머지를 읽기 위해 저녁을 후딱 먹어치울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그 이유를 보여준다.   

    19세기와 20세기의 거의 모든 위대한 소설에서 우리는 표준적인 사회적 위계에 대한 공격 또는 회의, 그리고 경제적 자산이나 혈통보다는 도덕적 가치에 따른 순위 재배치를 발견하게 된다.   

많은 유머가 지위에 대한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럼으로써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 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정치  

    사회마다 각기 특정한 종류의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기술, 억양, 기질, 성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단죄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 대충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독교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얻은 뒤인 쉰한 살 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그의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톨스토이는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더 진정한, 더 의미 있는 길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악용을 할 수도 있지만, 잘 이용하면 성공을 위해 근본적인 일을 계속 미루며 살아가는 태도를 고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사회의 기대 가운데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파괴의 힘은 기껏해야 저지하는 정도이지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다. 국지적인 승리는 가능하지만, 몇 년 정도 혼돈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원시의 용액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이런 소멸의 전망에 위로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보헤미안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성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르지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예술을 즐기고 기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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