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림 - 천천히 대답하는 AI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마감을 지키는 AI

by 범진

천천히 대답하는 AI

dalle_032404_99911.png 둥실.. 두둥실... 시간을 가져요


실천하고 싶은 가치 중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느림의 미덕’이다. 한국 사회에서 빠름은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진다. 기다리기보다는 무언가가 이미 ‘처리 된 상태’로 존재하길 원하고, 일처리는 ‘빠릿빠릿’해야 하며, 대답은 즉각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속도를 기준으로 관계를 맺고 세상을 바라본다. 속도는 단순히 일을 빠르고 느리게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협동과 상호작용의 본질적인 리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가 매주 수요일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고 예고했는데 어느 날 하루 늦게 목요일에 올린다면, 나를 기다린 독자는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스케줄에 여유를 두고 조금은 느리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너무 느려서는 안 되기에, 적절한 템포를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느림의 가치는 AI의 발전 속도와는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AI는 묻는 즉시 대답을 한다. 만약 AI가 질문을 받은 후 5분 뒤에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능함’으로 간주할 것이다. 반면 인간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질문을 받고 잠시 고민하고, 때로는 하루가 걸릴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시간을 진지함과 사려 깊음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다. 느림이 사라지면서 사유할 틈도, 감정할 여유도 사라진다.”
— 한병철, 『피로사회』


철학자 한병철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빠름에 중독되어 ‘생각할 시간’을 잃고 있다. AI의 세계에서는 ‘답’만이 중요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답을 향해 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고민의 흔적이 있는 대답이 더 깊고 의미 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AI가 인간처럼 느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AI가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진지하고 깊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Screenshot 2025-05-29 at 12.22.16 PM.png 천천히 생각해봐 AI야

더 나아가 AI는 정해진 자원과 계산 시간 안에서 결과를 도출해내고, 그것을 사용자의 기대 시간에 맞춰 내보낸다. 마치 택배처럼, 오늘 도착하기로 했으면 오늘 도착해야 한다. 더구나 AI의 ‘오늘’은 5분, 아니 5초 단위로 압축된다. 이처럼 AI는 절대로 지각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항상 제시간에 반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는 왜 때때로 느림을 미덕으로 여길까?


선생님이 수업 중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한 학생이 아무 망설임 없이 즉시 대답한다면, 그 모습은 오히려 진지하지 못하거나 성급해 보일 수 있다. 반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몇 초 뒤에 천천히 대답을 하면, 선생님은 그 학생이 사유를 통해 진지한 응답을 내놓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답을 내는 과정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빠르다는 건 항상 좋은 게 아니다.


“모든 것은 천천히 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가 버린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깊은 의미는 천천히 찾아온다. 빠른 결정과 즉답이 항상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AI가 지금보다 조금 더 천천히 대답한다면, 그 대답이 우리에게 더 신뢰감을 줄 수도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진정성 있는 응답의 태도일지 모른다.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느림이 주는 효용은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간의 속도를 맞추고, 위기 상황에서 여유를 갖게 하며,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 한다. 조금의 여유가 타인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그 틈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미래에는 AI조차도 그 딜레이를 모델링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복잡한 질문에 대해 “이 문제는 조금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AI. 혹은 “30분 후에 다시 답을 드릴게요”라고 말하는 AI. 그것은 단순한 시스템의 느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AI를 우리가 상상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결국, 느림 혹은 늦음이라는 가치는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다움을 지키고, 타인을 이해하며, 깊이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식이다. 빠르게만 달리는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마지막 속성. 그것이 바로 ‘느림’이다.


느리게 오기

Image Credit: Artist Elice

dalle_032404_99911.png 깊이 있는 삶은 천천히 와야 한다.


keyword
이전 19화레이어 - AI가 쌓아가는 세상에 대한 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