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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남자 Aug 15. 2022

제77주년 광복절의 의미

다시 한번 그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어린 시절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강제징용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매일 같이 고생만 하시고 가까스로 살아서 돌아오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말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관련 내용을 더 들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동네의 훈장이라고 하셨다. 조그마한 마을에서 공부를 많이 하셔서 이름을 짓거나 여러 마을의 큰일을 할 때는 조언을 해주시곤 했다. 여기저기 모두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마을 어른의 역할은 지금 현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 보다고 컸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다시 고향에서 삶을 꾸렸다. 여느 시골의 어른들처럼 남아선호 사상이 아직도 끔찍하게 남아있었던 시절 나와 동생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셨다. 특히 첫 손자이니 말해 무엇하랴. 물론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을 잘 몰랐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가 월남전 파병 후에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흐름과 혈육을 전쟁에서 잃었던 그 기억을 어린 손자에게 이야기하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어린 내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나 있었을까만은 담배 한 모금에 연기를 하얗게 내뿜으며 이야기하시던 옆모습은 고스란히 어린 기억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유명한 독립군의 이름과 같은 것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할아버지의 과거의 기억과 소망, 알 수 없는 희망과 회환 때문이 아니었을까?


광복절이 되면 항상 할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지금은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청소년 시절을 겪으면서 할아버지에게 살갑게 다가서지 못한 나의 마음이 항상 죄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역사의 한 축을 몸소 겪었던 분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그나마 되새길 수 있는 날이 이런 날이지 않을까 싶다. 회사를 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편하게 놓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은 뵙지 못하는 분들의 노력임에는 분명하리라. 그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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