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을 베개 삼아 머리를 대고, 술이 취한 노인은 잠이 들었다. 개 잡는 날 들이킨 막걸리는 온 몸의 혈액을 집어 삼킬 듯 입안으로 흘러 들어갔고, 알코올은 신경을 잡아 끌어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눕고만 싶었던 차에 베개로 쓰기 적절한 높이의 철로는 노인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어지러운 잠이었다. 헤어나올 수 없을 꿈에 취해 있을 무렵, 기차가 그 노인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전라남도 구례시 용림리. 저 멀리 지리산의 능선에 푹 안기듯 움푹 파인 지형으로 자리잡은 이곳. 섬진강 갯물이 졸졸 흐르고 물 아래 우렁이(올갱이의 방언)이 바가지 넘쳐나도록 잡히는 이 말끔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다 가족 또는 친지, 친지의 친지, 돌고 돌아 사돈의 팔촌 안에 촌수 계산이 가능했다. 비옥한 땅에서 기름기 흐르는 쌀을 생산하는 용림마을은 대대로 조용했다. 윗놈들이 일제든 조선이든 상관없었다. 먹고 살 쌀과 밭을 일굴 땅과 우렁이가 잡히는 강물은 험난한 한국사 안에서도 이 마을을 지켜주었고, 그 안에서 경관을 한들 친일이라 할 것이나 있겠는가, 그 안에서 관직을 거부한들 독립운동이라 할 일이나 있겠는가. 지지고 볶고 네 땅 내 땅 가리지 않고 온 가족이, 친지가, 사돈의 팔촌에 얼굴 아는 마을 사람 모두가 굶지 않고 사니, 마을은 늘 조용했다.
우리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일을 했다. 경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아닐지도 몰랐다. 경찰 제복을 입기도 했었지만, 내가 너무 어린 나이어서 그것이 제대로 된 제복인지 치안담당 경비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가 경찰이라고 믿고 살았다. 녹을 꾸준히 받아왔고 집에 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젊은 아버지는 위세가 등등했고, 그 권위는 5남매 가족 앞에서 더욱 살기를 띠었고, 어머니는 늘 선두에서 그 위세에 밟혔다. 어린 나이어서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저 늘 부엌에서 누룽지를 긁어먹던 어머니는, 어느 날 부뚜막에서 농약을 마셨다. 어머니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어머니는 곧 다시 생겼다. 새로운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식구가 되었다.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특혜를 얻은 큰오빠는 곧 장가를 들었다. 넓은 밭과 마당있는 집은 당연히 큰 오빠에게 돌아갔다. 시골집과 농사지을 땅과 밭이 큰 오빠 몫이었으므로 중학교까지만 마친 작은 오빠와 나, 두 남동생은 여기를 떠나 서울로 가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돈을 벌어야했기에 작은오빠와 두 남동생은 노가다, 막노동자가 되었고 나는 작은 공장에 들어갔다가 다른 회사의 경리 일을 했다.
그 사이 큰 오빠는 쌀 농사를 버리고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오이를 심었다. 상품작물이라 몇 해 동안은 수입이 꽤 짭잘한 모양이었으나 늘 돈이 없어 힘들다고 했다. 동생들은 모두 큰 오빠가, 아니, 사실은 새언니가, 욕심이 가득차다고 흉을 봤다. 그래도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들은 한치앞을 몰라 불안했다. 한해 농사가 망하면 한해를 굶는 일이라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비닐하우스로 갔다. 하우스 안에서 하루는 다 가곤 했다. 아들 하나 낳아 기르며 농사꾼 아닌 놈으로 키워보려고 기를 썼다. 오이를 판 돈은 모조라 아들 앞으로 들어갔지만 아들은 공부에 별 뜻이 없었고, 이래저래 헤매다가 애가 먼저 생겨 서둘러 결혼을 시켰는데 그 결혼자금 대느라 땅도 팔고 돈도 다 썼건만 몇 개월만에 이혼한다고 지랄들을 했다. 요새 젊은 것들 부모가 막을 수가 있겠는가. 결국 이혼을 했는데, 큰 오빠는 그 계기로 우울증이 왔다. 사람도 안만나고 나중에는 가족들하고 마주치기도 힘들어했다.
얼마 있다가 둘째 오빠도 장가를 갔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둘째 오빠의 새언니를 나는 도저히 새언니라고 부를 수 없어서 올케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녀를 벅수같다고 했다. 새언니인 올케는 행동이 느리고 많이 먹었다. 앉아서 미싱일을 잘해 베개나 이불 같은 것을 누비며 돈도 벌었지만 한시도 가만 못있는 우리집 식구들 성질머리와 맞지 않아 속이 터졌다.
내 바로 아래 남동생도 곧 서울로 따라 올라왔다. 작은 오빠네와 우리 집을 오고 가며 공장일과 노가다 일을 해 돈을 벌었다. 건설 인력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많이 배우지 못한 우리 시골 출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돈벌이였다. 다치고 힘들어도 이 일을 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고 먹고 살 수 있어서 다행 아닌가. 젊은 나이에 힘이라도 쓸 수 있어서 좋았다.
막내 남동생은 그림을 잘 그렸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한 애가 재능은 타고 나는지 연필만 갖다주면 슥슥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놓곤 했다. 내 딸과 아들은 그런 막내 외삼촌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dd도 결국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했다. 그림을 그리던 손은 공사 현장에서 나무를 다듬는 목수 일을 하느라 굳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