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기획자의 노트(3)_기획의 힘은 세다
시간이 날 때마다 다큐멘터리를 즐겨본다. 넷플릿스 회원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좋은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에게 자주 추천하는 다큐멘터리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기 위해 넷플릭스에서 <던월> 링크를 검색하다가 확인한 게 하나 있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나 드라마에 라이선스 기한이 있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던월>은 라이선스 기한이 끝나 더 이상 넷플릭스에서 볼 수 없다. 아직 DVD 출시도 안 되어 있고, 다른 OTT 서비스에서도 볼 수 없다.
넷플릭스에는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요청하는 고객 서비스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요청해서 다시 라이선스 계약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7108
가장 어려운 구간에서 며칠 동안 실패를 거듭한 뒤 이제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상황에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 구간을 통과하는 <던월>의 장면을 보면서, 나는 엄기호의 <공부공부>에서 읽었던 '기예'가 떠올랐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의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는 것을 다룰 수 있게 될 때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부에서 익힘을 강조하는 이유다. 배움에 이어 익힘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공자가 말했듯이, 배우고 때때로 익힐 때만이 배운 것을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뭔가를 다룰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다. 또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창조의 기쁨. 이것이 자유가 제공하는 가장 큰 기쁨이다. (238-239쪽)
2021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은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문어가 이처럼 머리가 좋은 줄 몰랐다. 동물학자에 따르면 강아지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문어는 다이버 크레이그 포스터를 알아보며 장난치고 놀자고 한다.
문어만 머리가 좋은 게 아니고 두족류(頭足類)인 오징어와 낙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스위스, 영국 등 유럽 몇몇 나라는 두족류를 산채로 삶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거나 추진중이라고 한다. 산낙지 요리를 즐겼던 것도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산낙지 탕탕이나 산낙지를 끓는 물에 넣는 전골 요리를 먹을 때마다 너무나 불편하다. 그때마다 <나의 문어 선생님> 이야기를 해준다.
https://www.netflix.com/title/81045007
넷플릭스에 문어 다큐멘터리가 더 있다. 과학 다큐멘터리 <애니멀>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데, 문어뿐만 아니라 두족류 전체를 소개한다. 과학적 사실은 있지만 <나의 문어 선생님>처럼 스토리는 없는 영화이다.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스토리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https://www.netflix.com/title/81145024
북극 빙하가 녹고 있다는 얘기는 이제 너무 흔하다. 그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북극곰이다. 빙하가 녹아 먹이가 사라지고 사냥도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굶주리는 북극곰은 기후재난의 상징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 그 심각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빙하 한가운데 저속촬영카메라를 설치해 몇 년 동안 촬영했다. 몇 년의 시간을 단 몇 분으로 압축하자 빙하가 얼마나 심각하게 녹고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쉽게도 <방하를 따라서>도 현재 넷플릭스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이 영화는 DVD로 나와서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다(인천에서는 주안도서관에 비치 중).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68898
<산호초를 따라서>는 <빙하를 따라서>의 해양 버전이다. 실제로 영화 앞머리에 <빙하를 따라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다. 산호초 한가운데 저속촬영 수중카메라를 설치해서 기후위기로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 백화현상으로 죽어가는 산호초 군락지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다.
<빙하를 따라서>와 <산호초를 따라서> 영화는 촬영카메라를 개발한 엔지니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 엔지니어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https://www.netflix.com/title/80168188
스토리를 담아서 산호초 백화현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퍼프: 산호초의 경이로움>이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아기 복어의 비현실적 귀여움 때문에 처음에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착각했다.
아기 복어 퍼프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며 산호초의 아름다움과 생태적 쓸모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성장 과정에 맞춰 다시 되돌아간 산호초 군락지의 죽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24시간 내내 몇 달을 바닷속에서 살지는 않았을테니 엄지 크기의 아기 복어 한 마리를 줄곧 따라다니며 촬영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한 마리 복어의 성장과정을 추적한 것처럼 연출하였다. <동물의 왕국>, <신기한 동물의 세계> 등을 보는 것처럼 편히 보면서 기후위기를 실감하도록 하자는 기획이었다고 짐작한다.
https://www.netflix.com/title/81276049
내가 처음 육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도록 만들어준 책은 존 로빈스의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였다(지금은 <육식의 불편한 진실>이란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이 책은 처음에 동물이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각과 감정을 가진 존재임을 여러 과학적 증거를 들어 설명한 뒤 끔찍한 공장식 가축산업의 실상을 보여준다. 글로 읽어도 끔찍한데 <카우스피라시>는 이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왜 환경단체들이 공장식 축산업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지 않는지, 자본의 힘이 어떻게 진실을 덮는지를 보여준다.
https://www.netflix.com/title/80033772
<산호초를 따라서>가 <빙하를 따라서>의 해양 버전이라면, <씨스피라시>는 <카우스피라시>의 해양 버전이다. 수산업이 어떻게 바다를 파괴하고, 왜 환경단체들이 해양오염을 이야기할 때 수산업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데서 변죽을 울리는지, 그 진실을 파헤친다.
https://www.netflix.com/title/81014008
좋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좋은 다큐멘터리가 있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기획이 훌륭해야 하겠지만, 그 기획을 현실화시키는 용기와 꾸준함,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