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나길 바랐던 9년 된 빨간 밥솥
밥이 잘 안 될 때는 슬쩍 반갑기까지 했다. 물을 보통보다 많이 넣어도 밥이 딱딱하고, 쌀을 오랜 시간 불렸는데도 쌀알이 톡톡 씹혔다. 드디어, 그래 마침내, 고장일까?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가전코너에서 밥솥을 봐 두었고, 마음속으로 김연아가 선전하는 하얀색 쿠첸으로 모델도 정해두었다.
그래도 마지막 예는 다하기 위해 빨간색 밥솥을 들고 AS센터에 가지고 갔다. 기사님은 압력을 잡아주는 고무 패킹이 많이 늘어나 있다며, 이를 바꿔주셨다. 고무 패킹을 못해도 일이 년에 한 번은 바꾼다는데 팔 년 만에 바꾸러 왔으니, 지금껏 밥이 됐다는 것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이래도 잘 안 되면 고장이라고 했다.
밥솥 뚜껑이 이전과 달리 매우 '꽉' 닫혔다. 우렁차게 '치키치키'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이 증기 빠지는 소리가 안 들렸는데, 그걸 몰랐던 거다. 쿠쿠는 확실히 건재했다.
이제는 밥이 잘 되길 바라는 건지, 안 되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어느 쪽으로 건 '밥이 잘 됐을까' 걱정하며 뚜껑을 열어봤다. 밥 맛이 훌륭했다. 헛웃음이 났다. 화이트 인테리어에 눈치도 없이 위풍당당하게 놓인 빨간 밥통, 이제 이 밥솥의 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때인지 손때인지 모를 얼룩이 닦이지 않아 무늬처럼 되고, 도색 부분이 들려서 벗겨지려고 하는 이 빨간색 쿠쿠는 2017년에 내가 처음 교사로 발령받을 때 자취방에 엄마가 사준 밥솥이다.
그때만 해도 밥솥은 대체로 빨간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이트 가전이 대세가 되더니, 밥솥마저 하얗고 매끄러운 도자기 같은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거기 비하면 빨간색과 검은색이 섞인 이 밥솥은 감성이나 세련됨과는 한참 멀어 투박하고 생활감이 짙게 느껴진다. 그래도 신혼집에도 가져갔고, 재작년 이사를 올 때에도 들고 왔다.
새 집에 어울리는 예쁜 인테리어 욕심이 나서 몇 번이나 바꿀까 고민도 했지만, 꼭 돈이나 물건이 아깝다는 문제가 아닌 좀 다른 이유로 머뭇거려졌다.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밥을 짓는 밥솥이, 9년째 고장도 안 나고 있다는 게 한편으론 싫지 않고 꽤 든든했던 거다.
이 밥솥에 나 혼자 먹을 밥을 하다가, 남편과 먹을 밥을 짓고, 첫째가 이유식을 떼고 밥을 먹기 시작하며 쌀을 더 많이씩 넣고, 이제는 둘째까지 네 식구가 먹을 밥을 짓는다. 매번 생각보다 빨리 바닥을 보이는 밥솥을 보며 당황하는데 이 모든 이야기가 그 빨간 통 안에 차곡차곡 담긴 것도 좋았다.
식탁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다 문득 주방을 보면 이 밥솥이 있다. 화이트 주방을 배경으로 생활과 세월이 묻은 밥솥이 "빨간색이 뭐 어때서?" 하는 표정으로 날 보는 것 같다. 이 장면이 나에게 가르쳐준다.
순백의 하얀 종이 같은 꿈과, 억척스러운 근성의 빨간 밥솥 같은 현실을 모두 끌어안고 가라고. 결국 생활과 삶은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나도 딱 저 밥솥처럼, 매일 기본적이고도 제일 중요한 제 역할을 묵묵하고도 튼튼하게, 오래 해내고 싶다. 겉모습은 조금 투박할지 몰라도 유행과 상관없이 자기 색깔을 지키며 꾸준하게 일정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기를. 빨간 밥솥에서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화면 위에서 커서가 일정하게 깜빡이며 다음 문장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