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를 책임지는 사랑
주방 불을 켰다. 거실에서 놀던 둘째가 포르르 따라와 주방 사다리에 자리를 잡고 섰다. 엄지손가락을 빠는 아이에게 참깨 통을 흔들며 쥐여주었다. 찰싹찰싹 소리에 웃으며 몇 번 만지더니, 이내 바닥에 떨어뜨리고 다시 손을 빤다.
아침 메뉴는 삶은 계란과 땅콩버터를 바른 식빵이다. 첫째는 땅콩버터가 테두리까지 꼼꼼하게 발리지 않았다며 짜증을 냈다. 나와 남편의 눈빛이 찰나에 마주쳤다. 너그러운 목소리로 "이제 됐니?" 하고 더 듬뿍 바른 조각을 내밀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던 건 둘만의 비밀이다. 나는 느릿하게 입을 오물거리는 아이 뒤로 가 머리를 묶어주었다.
남편은 둘째 감기약을 먹이고 양치를 시키곤 분주히 출근 준비를 마쳤다. 현관 앞에 서서 오늘도 늦을 것 같다며 미안해한다. 작년에 육아휴직으로 숨을 골랐으니 올해는 벅차게 뛰어오를 해다. 같은 초등교사인 그는 올해 연구학교에서 학년 부장을 맡았고 대학원도 등록했다. 회의와 연수, 출장, 수업과 과제가 이어진다. 하지만 매일 눈빛이 반짝이는 그를 보며, 나는 오히려 더 힘껏 재촉하고 등을 떠민다.
"뭘 걱정해, 나 집에 있잖아."
밝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첫째의 등원 준비는 또 다른 고비다. 옷 입자고 서너 번을 불러 겨우 앉혀놓으니, 느닷없이 '핑크핑크'로 맞춰 입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상의는 분홍빛이고 양말은 연보라색이니 충분히 예쁘다고 겨우 설득해 입혔다. 양치하러 불러오는 데만 또 한참. '참을 인'을 거듭 새겨야 한다. 그 사이 둘째에게는 '잠깐만, 누나 좀 해주고.'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새로운 기관에 적응하느라 첫째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 있다. 동생에게 엄마를 뺏긴 서러움과 자기 영역을 침해받는 불편함이 수시로 터져 나온다. 머리로는 성장통이라 이해하지만, 몸은 정직하다. '후우-' 하고 한숨을 증기 뿜듯 내뿜으며 깨닫는다. 빡침과 인내는 결국 숨 한 번 차이라는 것을.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첫째 손을 잡고 나서면 정말로 고지에 다다른 셈이다. 아이도 찬 공기가 반가운지 "아, 시원하다!" 하고 외쳤다. 멀리서 노란 버스가 다가오는 게 보이자 아이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안기, 하이 파이브, 뽀뽀 쪽. 마지막으로 다시 깊이 안기.
"엄마 저 응원하고 있으세요."
아이가 내 눈을 보고 말했다. 처음 버스를 타고 새 어린이집에 간 날, 모든 가족이 응원하겠단 말이 힘이 됐는지 매일 이렇게 당부한다. 동생에게 누나 잘 다녀와서 놀아주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러곤 제 무릎보다 높은 버스 계단을 씩씩하게 올라갔다. 나는 노란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너무 시원해하면 안 되는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게 숨겨지지 않아 짐짓 천천히 걸어봤다.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엔 첫째가 벗어둔 내복이 허물처럼 남았다. 옷을 주으며 핑크색 바지를 사줘야지 생각했다. 둘째는 누나가 못 만지게 했던 스테인리스 볼과 나무 주걱을 향해 돌진했다. 거실 가득 '땡! 땡!'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 퍼진다.
습관적으로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아이가 둘이 되고 커피도 하루 두 잔으로 늘었다. 오늘 밤까지 '독점 육아' 당첨이니 집안일은 미루기로 한다. 둘째가 낮잠 잘 때 한숨 자두고, 첫째가 하원하면 두 번째 커피를 들이켜야지. 저녁 메뉴는 간소한 볶음밥이 좋겠다. 챙- 챙- 둘째가 무작정 두드리는 소음 속에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얼음이 없어 미지근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첫째의 첫 접종 날, 큰 고구마만 한 빨간 아기를 속싸개에 싸서 품에 안고 간 기억이 난다. 둘째를 처음 집으로 데려온 날, 유독 작게 태어난 아기를 침대에 뉘어보니 더 작아 보여 한참을 바라봤었다. 그러나 첫째는 이제 식빵 테두리까지 잼을 안 발랐다고 짜증을 내고, 둘째는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 끈질기게 누나 곁을 따라다닌다. 남매가 함께 어울려 놀기보다는 서로 뺏고 뺏기며 울고 이르느라 바쁘다.
그런 거다. 인생에 절정은 몇 번 찾아오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도 사랑이지만, 이런 평범한 날을 그럭저럭 책임지며 사는 것도 사랑이지 않겠나.
사랑과 귀여움이 샘솟다가도 인내와 빡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일상, 의욕이 넘치다가도 체력은 금세 소진되어 시계만 보며 육퇴의 시각만을 가늠하는 나날. 3월의 소란한 등원 전쟁, 품에 가득 차는 두 아이, 그리고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우리 부부의 매일 위에도 기꺼이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미지근한 커피 두 잔으로 또 하루를 건너가 보련다. 칭얼대며 나를 부르는 둘째의 목소리에 커피를 서둘러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