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각인되어 버린 순간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기억
스무 살에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보다 좋아한다고 느꼈던 사람이 있었다.
불과 며칠 만에 너무 크고 깊고 진한 감정에 빠지게 되어 어쩔 줄을 몰라했던 그런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내게 그 사람은 온 우주처럼 넓고 찬란하고 아득했다. 그가 옆에 다가오면 온 세상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고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있는 곳이면 무슨 핑곗거리를 만들어서든 은근슬쩍 찾아갔다.
생애 첫 부산국제영화제. 저녁의 수영 요트경기장. 약간 싸늘했던 기온과 그의 따뜻한 손을 잡지 못함에 더 애타고 설레던 내 마음.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하고 무서웠던 명작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후속작들은 추천하지 않음). 그가 추우면 들고 있으라며 건네준 작은 가방에서 나던 비누 냄새. 내겐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너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 뒤로 두어 번 그때 그 공기가 그리워서 다른 사람들과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지만 그때의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어렸던 시절이었고,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던 그 사람은 이미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난 후였을 것이다. 스무 살 갓 성인이 된 여자애는 그에게 다루기 쉬운 상대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내게는 그런 것을 알아차릴 정도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일 년을 그어버린 '나 혼자만의 연애'는 허무맹랑한 그의 한 마디와 나의 외마디 분노의 외침으로 어이없게 끝나버렸지만, 그런 시절에 있어서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런 엄청났던 마음을 가져보았다는 게 의미가 있다.
그와 함께 갔던 남포동 골목골목과 헌책방들, 오래된 순두부 식당도 기억난다. 자갈치 시장 어귀에 서서 갈매기 떼 구경을 하던 것도. 그가 좋아하는 피아노곡을 잘하지도 못하는 연주 실력으로 열심히 연습하던 것도.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으로 번갈아 채워가며 그가 들어주길 기다리던 것도. 그가 내가 좋아하는 딸기 요구르트를 내 작은 사물함에 가끔 넣어놓던 것도. 동아리 엠티를 가서 다른 사람들이 바닷가 구경을 나간 사이에 잠든 척하며 서로 손바닥에 글씨를 새겨 넣던 것도.
내게 있어 그때의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달랐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고, 또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각인된 기억들이 앞으로도 할머니가 될 때까지 잊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게도 설렘과 아픔으로 가득한 사랑을 하며 빛나던 때가 있었다는 걸 그것으로 깨달을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