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분주 Jul 21. 2023

손님 이 머리는 안되세요

78

 성인이 되어 두발자유화를 만끽하면서부터 머리카락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은 다 도전했다. 다이어트는 힘들고 성형은 비싸기 때문에 가장 손쉽게 외모 변화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도전 안 해본 머리색이 없다. 핑크색부터 초록색까지 사람 머리카락으로 나올 수 있는 머리색은 대부분 해봤다. 관심종자끼가 다분한 나로서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머리색깔이 예쁘다고 말해주면 기분이 째졌다 오예-. 일 년에 최소 2번은 스타일 변화를 줬는데 염색은 집에서 셀프로 했다 왜냐하면 미용사들과의 기 빨리는 대화에서 빠져나올 자신도 없고 돈도 없다. 셀프염색을 하면 고막과 돈을 아끼는 대신 머릿결은 포기해야 한다. 돈은 없다가도 또 없지만 머릿결은 계속 자라나니 난 후자를 택한 셈이다.

  

그렇다고 아예 미용실을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파마는 미용사에게 시술받는다. 하지만 왠-만해서는 미용실에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미용실 갈 때마다 미용사들이 내 머리에 대해 훈수 두는 게 너무 듣기 싫다 엉엉.  특히나 미용실에 가면 나는 호갱이 되기 일쑤였다. 분명 파마 5만 원이라는 광고를 보고 갔는데 어느샌가 기장추가금에다가 영양요금에다가 클리닉요금까지 더하고 더하고 더해서 5만 원이 30만 원까지 불어나는 기적을 봤다. 물론 하기 싫다는 의사를 밝히면 되지만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때문에 호구처럼 그... 그럼 그렇게 해... 해주세요... 라 대답하고 속으로는 괜히 왔다 후회를 하곤 했다. 


예전에 핑크색 머리를 한 뒤 물이 빠져 보기 싫은 겨자색이 되었고 또 물이 빠져 머릿결이 빗자루가 되었을 때쯤, 울며 겨자 먹기로 미용실에 갔다. 그래 이왕 돈 쓰는 김에 전지현 같은 긴 생머리를 도전해 보는 거야! 위풍당당하게 미용실 문을 열었다.

여기 주인장 나와보슈.

환불받으러 온 거 아닙니다.


나의 빗자루 같은 머릿결에 눈을 떼지 못한 미용사는 일단 앉아보라 말했다. 그리고 내가 우려했던 미용사 언니의 청학동 수준의 훈수가 시작되었다.


"손님 이 머리는.. 안되세요."


... 나 아무 말 안 했는데. 아직 아무런 요구사항을 말하지 않았는데 미용사는 그냥 다짜고짜 안된다고 했다. 머리가 안된다는 걸까 내 얼굴이 안된다는 걸까. 아 저기. 혹시 매직으로 머리  필수 있나요오오오. 공짜 머리협찬이 아닌 내돈내산 할 건데 나도 모르게 미용사 언니의 께름칙한 표정에 잔뜩 쫄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미용사는 한숨을 내쉬며, 본인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나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똥 묻은 휴지 줍듯 아슬아슬하게 들고서는,


"손님-, 이 머리는 머리카락이 아니고 그냥 달고 다니시는 거예요."


... 야단 오지네.  날 毛자란 년으로 업신 여기는 듯한 애매한 기분. 그래 기분 탓이겠지.


"손님이 해달라고 하면 해-드릴순 있는데, 나중에 머릿결은 장담 못하세요. 머리가 끊길 수도 있고 샴푸 할 때마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저희가 책임못지세요."


... 그냥 차라리 안 하겠다고 해라 이년아. 돈 때문에 해주긴 할 건데 나중에 니 머리 대머리 돼도 내 탓 아님 스킬을 사용하는 미용사언니의 태도가 참 거슬렸다. 내돈내산이 아닌 내가 돈 내고 내가 혼난, 내돈내혼이 될 듯싶었다. 긴 생머리 미녀스타일에 도전하고 싶은 나의 욕구를 싹 잘라버린 제초기 같은 미용사의 말투에 언짢아져 살아생전 다시는 이 집 문턱을 넘지 않으리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집은 아이러니하게 꽃집으로 바뀌었다.




너저분한 머리스타일이 꼴 보기 싫어질 때쯤 친구에게 물어 죽은 머리스타일도 살리는 머리카락계의 허준이 운영한다는 먼 동네미용실을 찾아갔다. 미용실에 들어가니, 축구선수 김병지 머리스타일, 일명 병지컷을 한 50대 미용사 아주머니가 검은색 시스루룩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재방송되고 있는 막장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폼 미쳤다. 이 집은 찐이다. 미용만 100년을 연마했을 것 같은 아우라에, 이곳은 분명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얼굴도 가위로 예쁘게 도려내줄 것 같았다.


명성에 비해 손님은 없는 게 이상했지만 뭐 어때 기다릴 필요가 없구나. 인사만 간단히 하고 쭈뼛쭈뼛 서 있는 나에게 미용사는 가운데 자리로 안내했다. 금방 식사를 하셨는지 계속 혓바닥으로 본인 이빨 셀프 스케일링을 하며 쭈압 쩝쩝거리는 게 영 거슬렸지만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일단은 한발 후퇴.


머리를 어떻게 해드릴까 묻길래, 일단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C컬 파마에다가 머리가 작아 보이게 레이어드컷을 해 달라 부탁했다. 김병지 이모는 그전 미용사처럼 내 말을 끊거나 무작정 안된다고 무례하게 말하지 않고 묵묵하게 듣고만 계시다가 세상을 다 깨우친 도인처럼 한마디 하셨다.

17만 원.

카드 안돼.


... 허름한 인테리어만 보고 가성비 미용실 맛집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비싸네. 그 당시 물가로 꽤 비싼 편이었다. 옳다구나. 부르는 게 값이로구나. 나를 이곳에 소개해준 친구가 이 분의 조카가 아닐까 싶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망설이는 나에게 미용사는 C컬도 여러 스타일이 있고 유행하는 디자인이 있으니 일단 원하는 비슷한 스타일을 골라보라고 잡지 한 무더기를 줬다. 5년 전 잡지였다.

.... 찝찝하다 찝찝해.

미용계의 허준이라더니 왠지 머리도 조선시대 스타일로 해줄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사형대에 앉았고 미용사는 이미 내 목에 족쇄.... 가 아닌 미용커버를 둘렀다. 일단은 오늘 커트만 해달라고 했다. 파마는 다음에 하러 오겠다는 말로 미용사를 안심시켰다. 미용사는 젊은 감각에 맞춰 예쁘게 커트해 주겠다며 미용도구가 잔뜩 든 이동식 트롤리를 질질 끌고 오며 비장한 표정을 말했다.

커트를 시작하지.

손님 고개를 가만히 계세여ㅕㅕ 뭐가 잘려 나갈지 모릅니다.


... 제발 머리카락만 잘라주세요.

역시 이 미용사 이모도 빗질을 시작으로 나의 호구조사부터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본인 자녀의 훌륭한 성장과정스토리와 동네맛집리스트, 새싹보리 먹고 본인이 10kg를 뺀 이야기 등 네이버 지식인 수준으로 일절 쉬지 않고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가씨 고막 열어. 수다 들어간다.

 

이러면 안 되지만 머리카락대신 나의 달팽이관을 잘라줬으면 좋겠다고 0.1초 아주 잠깐 생각했다.


30년 경력의 이모 실력은 사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죽은 스타일도 살려낸다는 실력을 가진 게 아니라 죽어가는 청력을 살려내는 장기가 더 있는 분인 듯싶었다.

약속이 있냐고 묻는 미용사 이모의 말에 좀 있다 친구랑 만나기로 했다고 하니 스타일링을 서비스로 해주겠다 했다. 호이짜 호이짜. 병지컷 이모의 영혼을 갈아 넣은 고오급진 스타일링이 완성됐다. 뽕이 잔뜩 들어간 귀부인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는 곧장... 집으로 와 약속을 취소했다.

엄마가 나보고 20대로 집을 나서더니 40대가 되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힝.



올해 3월에 빠글빠글한 히피펌을 했다.

머리카락도 굵고 숱도 많아서 파마가 잘 풀리니 애초부터 아주 강력하게 빠-글-빠-글 말아달라고 했다.

작은 파마롤로 하나하나 일일이 수작업을 하던 미용사는 중간중간 팔다리어깨가 아프다고 연신 두드렸다. 굉장히 눈치가 보였다. 이 집은 내돈내산 + 내돈내눈치 구나.

"손님, 참 머리숱 많으시네여 하하"라 웃으셨지만 거울을 통해 본 미용사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오늘 안에는 못 끝내겠네 하하" 라 농담을 하셨지만 거울을 통해 본 미용사의 앙다문 입술은 진심이 백퍼 담겨 있었다.


5시간 뒤,

손님- 이 파마는 절대 쉽게 안 풀릴 거예요ㅕㅕㅕ


미용사 말이 맞았다.

히피펌 한지 125일이 지난 지금, 마치 어제 파마를 한 것처럼 머리가 빠글빠글하다.

그래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머리를 보고 한 마디씩 한다.


어후야.

머리 왜 그래.


... 아무래도 파마약과 함께 미용사의 저주도 들어갔나 봐요.








+

문신 인증샷 올립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