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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ul 24. 2023

할머니는 마법의 성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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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외할머니가 많이 우울해하신다. 할머니가 걱정되어 우리 집에 자주 모셔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할머니는 토크 자판기처럼 주제만 던져주면 끊임없이 에피소드가 줄줄 나온다. 문제는 회전초밥처럼 같은 이야기가 계속 돌고 돌고 돈다는 거. 콘서트도 관객이 있어야 할 맛이 나는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여러차례 수없이 반복하여 말씀하셔도 처음 듣는 것처럼 나와 엄마는 맛있게 리액션해 준다. 그래서 할머니는 우리를 좋아하신다.


 긴 장마로 인해 우리 집에 오질 못하는 할머니가 심심할까 봐 전화로나마 할머니의 수다를 들어주는데 대화 도중 수화기 너머로 할머니가 뭔가를 향해 자꾸 소리치셨다.


"어허이. 안-돼 거기 들어가지 마 이리 와 이리."


할머니께 뭐냐고 물어보니 삼촌이 최근에 갖다 줬는데 여간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했다. 자꾸 구석으로 기어들어가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당연히 삼촌이 할머니 적적하다고 새끼 고양이를 분양받았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도 볼 겸 할머니도 볼 겸 비 그친 날 바로 할머니댁으로 갔다.


 오랜만에 할머니댁에 방문했다. 얼른 새끼 고양이를 볼 생각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3층으로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할머니 할머니 저 왔어요. 새끼 고양이 어디 있어요 빨리 보고 싶어요. 라 말하니 할머니는 무슨 고양이를 말하냐며 이 손녀년이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할머니가 얼마 전에 전화로 뭐가 자꾸 돌아다닌다고 하셨잖아요. 그랬더니 이제야 할머니는 아- 저거. 저기 있네. 저게 자꾸 구석으로 처 기어 들어가네. 할머니가 가르치는 곳으로 눈길을 옮기니,

안녕하세요 이씨네 애완청소기입니다.

사사사삭.


.... 아.

상상도 못 했다. 오래된 할머니집에 최첨단 로봇청소기가 있을 줄은.

할머니 말대로 로봇청소기는 혼자 뽈뽈 거리며 자꾸 구석으로 갔고 영차영차 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소보다는 앉아만 계시는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움직여 운동하게 만드는 막내 삼촌의 큰 그림인 듯싶다. 그래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나름 귀엽다. 나도 로봇청소기 한 마리 분양받아야겠다.




 엄마와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할머니는 또 (했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일방적인 할머니 솔로토크콘서트였지만 엄마는 팬클럽처럼 열광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참 우리 엄마 효녀야. 배은망덕한 손녀는 가만히 듣고 앉아있기 심심해서 오랜만에 할머니댁 구경이나 하자 싶어 구석구석 돌아다녀봤다.


할머니집은 넓은데 쌓여있는 물건 때문에 좁아 보인다. 할머니가 밖에서 물건을 주워오는 건 아닌데 할머니는 물건이 아까워 버리는 법이 없다. 엄마가 처녀 때 신었던 밑창이 떨어져 나가고 삭아버린 쓸모 없는 구두들, 지금은 벌써 서른 살이 훌쩍 넘어버린 사촌동생들의 먼지 쌓인 돌사진 컬랙션, 바퀴가 다 빠진 여행캐리어, 지금 바르면 입술이 썩을 것 같은 유통기한이 20년도 더 지난 팥색 립스틱도 그대로 있다. 엄마가 우스갯소리로 할머니집에는 물건이 한번 들어오면 죽어서도 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이라 했다. 언젠가 사용할까 봐 버리지 않고 집에 쟁겨둔다기보다는 할머니는 가족의 추억이 묻어있는 물건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뭐 어디 재밌는 게 없나 싶어 베란다로 나갔는데,

수건: 거 참 죽기 딱 좋은 날이네....(제...제발 날 놓아줘..)

일광욕하고 있는 수건 씨. 조만간 걸어 나올 것 같다.


나무장작처럼 바짝 말라버린 인자한 표정을 보고 어서 내가 성공해 돈 많이 벌어서 할머니댁에 뽀송뽀송한 새 수건을 한 트럭 사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 창고에 새 수건이 한가득 쌓여있는 걸 보고 마음을 접었다. 수건에 눈코입이 생길 정도로 쓰시는 걸 보니 이쯤 되면 이건 할머니 애착수건이 아닐까 싶다. 디자인과 출신으로 판단컨데 원래 수건색깔은 아마 주황색이였지 싶다.


또 찾아보자. 뭐가 있을까. 하이에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찾아해메다 세상에 단 하나뿐 일 것 같은 진품명품을 발견했다.

섹시. 요염. 둠짓둠짓.

이 나무는 조만간 앞으로 뛰쳐나가거나 트월킹을 출 것 같았다. 신기해서 할머니와 엄마에게 좀 보라고 사진을 찍어 보여드렸는데 가만히 보던 할머니는 본인이 키우는 나무인 줄 모르고 무슨 삼계탕에 풀이 자랐냐고 징그럽고 불쾌하다 하셨다. 왠지 나무는 할머니가 주무시는 동안 밤새 집을 걸어 다닐 것 같다. 기괴해.




 흉측스러운 나무를 뒤로하고 옥상구경을 하기로 했다. 어릴 때는 옥상이라는 분위기가 주는 공포스러움에 절대 혼자서는 가지 못했다. 오빠가 할머니집 옥상에는 초딩 잡아먹는 귀신이 있다 했는데 순수하게 난 그 말을 믿었었다. 옛날 생각에 잠겨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데 못 보던 철문이 있었다.

분명 내 기억에는 여기 문이 없었는데. 언제 생겼지.

할머니께 물어봤다. 할머니 할머니 저 문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 그거, 그거 한번 열어서 들어가 봐.

니가 초능력자라면.

벽을 뚫고 들어가 보려면 한번 해보시던가.


....철문은 페이크다 이놈아.

할머니는 왜 저 문을 저기에 두었는지 또 저 문은 어디서 어떻게 들고 온 건지 의문이다.

할머니집은 뭐랄까...이상하다.



 차가 막힐 시간이 돼서 서툴러 엄마와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항상 우리가 갈 때면 버선발로 뛰어나오셔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가만히 쳐다보셨다. 예전에는 그 모습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더욱 할머니의 모습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언제까지 할머니를 볼 수 있으려나. 굽은 허리로 1층까지 배웅 나오신 할머니를 보니 코끝이 찡했다. 눈물이 나오려는 찰나에 할머니가 1층에 붙여놓은 큰 메모가 눈에 보였다.

소병금지


'소병금지 대병금지'

'동네사람들 여기 소병금지니 제발 소병 누지 마세요'


아쉬워하는 할머니의 먹먹한 표정을 보는데 자꾸 머릿속으로 웃긴 생각이 나서 두 눈과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혹시 노상방뇨 하러 온 사람이 저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으니 다음번에는 옆에 가위를 그려놔야겠다.


출처: SM타운

'여기서 소병 누시면 뭐가 잘려나갈지 나는 책임 못지오'

 

싹둑.




 우리가 떠나면 할머니 혼자 쓸쓸히 3층까지 계단 난간을 잡고 느릿느릿 걸어 올라가실 생각에 쨘했다. 할머니와 함께 맞이하는 여름은 앞으로 몇번이나 될까. 부랴부랴 지갑에 있던 현금 3만 원을 꺼내 할머니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손에 쥐어드렸는데 할머니는 손녀가 힘들게 번 돈이라 거듭 거절하셨다. 너무 완강히 거절하시기에 다음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는 말로 대신했다. 할머니 지금은 제가 백수나부랭이라서 돈이 없는데 꼭 성공해서 제가 할머니 용돈 많이 드리고 좋은 곳 좋은 음식 좋은 거 많이 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냐. 할매 돈 많아.

열심히 일하고 많이 벌어서 니 삶을 위해 써.

난 자식한테 손 안 벌려.


자식손자들이 힘들게 번 용돈을 매번 거절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할머니는 건물주다.







끗.




+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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