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찐친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짧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아쉽게도 일기예보에는 긴 장마가 예상되어 물놀이는 취소해야만 했다. 하루종일 펜션에서 머물면서 먹고, 놀고, 먹고, 놀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놀기만 하면 지루할 것 같아, 3명 이상만 모이면 항상 하는 '쓸데없는 선물 주고받기'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했다. 1등에게 설거지와 청소 면제라는 엄청한 혜택을부여한다는 규칙과 함께.
예전 직장에서 누군가가 대머리 직원에게 샴푸세트를 선물하는 것을 목격한 이후, 나는 이 세상에는 이보다 더 쓸모없는 선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고기불판, 술병, 과자 부스러기들, 그 외 등등등을 치워야 하는 고된 현실에 직면하면서, 감동적이면서도 재미있고, 저렴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정말 쓸모없는 선물로 1등을 차지하기 위해 며칠 밤낮으로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다. 그리고 드디어, 샴푸세트를 능가하는 궁극의 선물을 발견하게 됐다.
아무리 쓸데없는 선물 교환식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성의를 보이자며, 겉으로 보이는 포장은 그럴싸하게 하자고 약속했다.
누가 보면 크리스마스 파티인 줄.
간단한 게임을 통해 승부를 정하고, 차례대로 마음에 드는 선물을 뽑기로 했다. 선물은 모두들 앞에서 풀어야 했고, 솔직한 리액션을 보여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누가 무엇을 뽑든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금지한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가장 먼저 J가, 한눈에 보기에도 부피가 큰 봉지를 덥석 잡았다. 봉지를 흔들어보니 가벼운 느낌이랬다 J는 봉지의 무게부터 쓸데없다는 말로 공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선물이었기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J에게 집중되었다. 선물을 준비한 O양은 급하게 선물을 준비해야 했기에 포장할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런 O양을 보니 저년은 선물포장 점수에서 이미 마이너스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라이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J가 긴장되는 손으로 비닐을 뜯어보니,
일명 방구쿠션
그것도 소리가 각기 다른 3종세트.
저 위에 앉으면 힘없는 방구소리가 튜브를 통해 '히이잉' 새어 나오는 그런 예상 가능한 선물이다.
탈락
포장이 허름할 때부터 알아봤다. 넌 그냥 탈락이야.
포장점수 0점
창의력 0점
재미 0점
다음 순서로 J의 와이프인 여자 J가 포장이 그럴싸한 선물을 들고 왔고, 남편 J처럼 봉지를 흔들어보며 생각보다 가볍다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구 쿠션보다는 나을 것 같다"며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오징어 쿠션 당첨이요
방구쿠션보다 덜 한 게 나왔네.
차라리 방구쿠션이 낫소.
사진을 크게 찍어서 상당히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손바닥만 한 쬐깐한 사이즈다. 애완견장난감을 사온건 반칙 아니냐며 따지는 그녀를 보며 선물을 준비한 K 역시 이렇게 작을 줄 몰랐다며 어쨌거나 쓸데없으니 본인이 1등이라며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며칠 검색을 한 나로서는, 저 오징어 쿠션을 목록에서 보았지만, 너무 창의력이 없어서 걸렀는데 내 친구가 똑같은 오징어 쿠션을 사다니... 역시 예상 가능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장점수 5점
창의력 1점
재미 1점
탈락
세 번째로, O양이 선물을 골랐다. 여자 J가 고른 선물과 똑같은 포장이 된 걸로 봐서 부부끼리 준비한 선물 같았다. 오징어쿠션을 선물로 산 걸로 봐서는 분명 다른 선물 안에는 문어쿠션이나 멸치쿠션이 들어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막상 종이 가방에서 꺼내보니 오징어쿠션보다 크기가 더 작았다. 선물 크기에 비례하는 실망감을 느꼈다. 이미 앞선 두 차례 노잼 선물들이 나오는 바람에 서서히 우리들도 분위기가 다운되고 있었다. O양이 포장지를 뜯어 펼치는 순간.
넌 그냥 탈락.
다음으로 K의 차례였다. 크리스마스 포장지에 정성스레 포장되어 있는 두꺼운 선물을 골랐다. 아.. 내가 고르고 싶었는데 게임에서 진 탓에 내 순서가 늦어버렸다. 포장을 뜯기 전 상자를 흔들어보더니 이제와는 다른 묵직한 뭔가가 들어있는 거 같다면 신이 나서 포장을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뱃살 가방 당첨이요
사진으로 보기에도 징그러운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더욱 끔찍했다. 마치 현실감 10000%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누구라도 허리춤에 이 가방을 메고 다닌다면 백 프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것 같았다. 나는 이 선물을 보면서 살짝 위기감을 느꼈다. 이건 분명히 인정해야만 할 정말 쓸모없는 선물이다. 앞의 세 가지 선물들은 그래도 그나마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뱃살 가방은 진짜 넘사벽이다. 다들 끔찍한 반응을 보이자, 선물을 준비한 J가 신나게 부연 설명을 했다. 가방을 살 때 털이 난 버전과 털이 없는 버전이 있었는데, 털이 난 가방이 더 혐오스러울 것 같아서 추가금 500원을 더 내서 샀다며 헛소리를 해댔다.
섬세한 가방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포장점수 10점
창의력 8점
재미 8점
현재까지 K가 고른 징그러운 가방이 1등 자리를 차지했다. 분위기가 뱃살 가방을 이길 수 있는 선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모두가 J를 부러워했다. 나도 초조함에 똥줄이 타들어갔다. 사실 뱃살 가방을 나도 보긴했지만 실물은 별로일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가방을 보니 인터넷 화면보다 훨씬 더 실감 나고 더러웠다.내가 저걸 샀었어야 했다.
다음으로 선물을 고를 차례는 나였다. 내가 준비한 것과 다른 하나가 남아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남아있는 가장 초라해 보이는 선물을 선택해야 했다. 선물은 크기는 가장 컸지만, 정말 얇았다. 포장을 뜯기 전, 속으로 "설마 저년들이 2023년 지나간 벽걸이 달력을 준비한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절대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티를 내면 안 되니, 일단은 무엇이 나오든 크게 웃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포장을 뜯어보니...
애니메이션 가발 당첨.
노
잼
탈락
다음이요.
마지막 순서로, 드디어 내 선물만 남았다. 역시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그날은 행운의 여신도 나에게 미소 지었나 보다. 선물을 고르는 마지막 사람은 평소 리액션이 풍부한 K의 남편이었다. 작은 일에도 개그콘서트 방청객 수준의 맛있는 반응을 하는 그의 리액션에 나의 승부가 걸렸다. 그는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을 들고 와서는 흔들어보았다. 선물이 너무 가볍다는 것을 느낀 그는 "혹시 공기를 포장한 건 아니냐?"는 헛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줬다. 고마워요.
그가 천천히 포장지를 뜯고 종이 박스 뚜껑을 조심스럽게 살짝 열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기겁을 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런 씨이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이이ㅣ
성공.
그는 너무 놀라 뒤로 튕겨져 나갔다. 옆에 앉아 있던 K도 궁금해 박스 뚜껑을 확 열고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을 공개했다.
내가 싼 똥 아닙니다
우리 집 바퀴벌레 아닙니다
장난감입니다.
포장점수 9점
창의력 10점
재미 10점
다들 벌칙아니냐며 경악했다.
1등 확정이요.
훗
선물 나누기를 마치고 게임의 결과대로, 나는앉아서 혼자 저멀리서 쉬고 나머지 인원들은 청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