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세 번째 아르바이트로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있는 리조트에 일을 구하게 됐다. 숙식이 가능해 짱 박혀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고민 없이 바로 배를 탔다. 이곳은 배 타고 40분 정도 들어와야 하는 시내와 떨어져 있는 휴양지로, 요금이 비싸다 보니 손님들 대부분은 부자들이고 매너가 좋았다.
일주일에 4일만 원하는 요일에 일하면 됐고, 손님에게 제공되는 스파, 수영장, 스노클링 등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직원들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고 가끔씩 리조트 사장 소유의 고오오급 요트를 타고 섬 주변을 구경도 시켜줬다. 개이득.
섬에는 코카투라는 앵무새들이 많이 살았다. 얘네들은 호주 어딜 가든 볼 수 있는 머리에 노란 깃털이 있는 뚱뚱한 하얀 새로 사람을 안 무서워하고 심지어 똑똑하다.
심심해서 한 두 마리한테 조식으로 먹고 남은 식빵을 줬는데 어느새 퇴근시간만 되면 내 기숙사방 문 앞에 코카투들이 바글바글 했다. 코리안 외노자가 인심이 후하다고 소문났는지 시간 맞춰 날아오는 것도 신기했고 뚱땅뚱땅 거리며 받아먹는 것도 귀엽고해서 먹이를 챙겨줬다. 그래서 어느 새부터 직원들은 나를 Miss 둘기아줌마 라 불렀다.
저 코리안 외노자 낮설지가 않아.
그렇게 몇 주 동안 밥을 챙겨주다 보니 점점 밥동냥하는 새들이 늘어났고 하루 30-40마리가 죽치고 앉아서 시끄럽게 울거나 똥을 싸지르는 사람에 기숙사 직원들이 눈치를 줬다. 마릿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니 나도 점차 무서워져 쫓아내려고 빗자루를 위협적으로 휘둘러도 봤고 여러 번 괴성도 질러봤지만 이 배은망덕한 것들이 내가 먹이를 주다가 안 주니 더 열받았는지 공격적으로 나왔다. 아예 하루종일 문 앞에 죽치고 앉아 여차하면 나를 공격할 기세로 슬금슬금 돌아다녔다. 칼만 안들었지 이것들은 깡패다.
이것들은 덩치도 크고 부리도 딱딱해 한번 쪼이면 장기 하나는 그냥 날아가겠구나 싶은 두려움에 부끄럽지만 한동안은 새들 눈치를 보고 기숙사 방 반대편 작은 창문으로 기어서 출퇴근을 했었다. 먹이 줬다가 내가 먹이가 될뻔했지 뭐야.
기숙사에 살면 밥값이 많이 들지 않는다. 10개 묶음의 식권을 사서 매일 달라지는 메뉴를 보고 맛있는게 나올때마다 밥을 먹고 그렇지 않은 날은 미리 마트에서 사둔 신라면으로 봉지라면을 해먹었다. 리조트 레스토랑 쉐프가 직접 직원 식사를 준비해줬는데 그 중 호주인 Alex가 나를 끔직히 좋아했다. 우린 직원 파티 때 몇 차례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의 강한 호주발음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 그냥 웃음으로 맞받아쳤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대놓고 챙겨줬다. 혹시 나한테 고백했는데 내가 웃음으로 받아준건가.
식사 시간때마다 Alex는 코카투 앵무새처럼 내가 올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고서는 매번 손님 판매용 고오급 요리를 갖다 줬다. 그것도 꽤나 형식을 갖춰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볼 법한 은접시에 커버까지 닫아서 정성스럽게. 처음에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좋아서 덥석 받아먹었다.
역시 셰프 음식 야미야미. 존맛탱.
스바라시 호주 음식.
그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쎈 억양과 나의 모자란 영어실력은 늘 가족오락관 고요 속의 외침처럼 서로 딴소리를 해댔다. 그러던 Alex가 한국인 룸메이트 직원한테서 이상한걸 배웠는지 계속 나에게 뉴나 뉴나 거리면서 매일 배운 한국말을 나에게 써먹었다. 30대인 Alex가 20대인 나에게 뉴나 거리는 것도 듣기 거북했지만, 노력이 가상해 처음에는 응응 잘한다 너 굿잡굿잡 해줬다. 뉴나 이뽀 뉴나 한쿡쏴람 뉴나 쪼아효 점점 멘트가 부담스럽게 바뀌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했었다. 왠지 이러다가 곧 싸랑해요 연예가중계 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Alex는 나를 위해 한국말도 배우고 성격도 착하고 친절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다 좋았지만 단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펄럭거리는 코털이다(콧수염 아님 코안에 있는 털임) 그는 머리색도 눈썹도 밝은 색인데 이상하게 코털은 길고 쌔까맸다. 말할 때마다 그의 입김 때문인지 코털이 하늘하늘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고, 또 어쩔 때는 왕개미 더듬이처럼 삐쭉 삐져나와 도저히 신경 쓰여서 그와 마주 보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다 인간이기에 코털이 있지만 Alex는 급이 달랐다. 왠지 잡아당기만 끝없이 길이이이이이일게 나오는 마술도구 같은 그런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질감이었다. 한번 신경 쓰이니 아무리 Alex가 잘해주고 옆에서 한국말을 쫑알거려도 내 마음속으로 응 너 코털 왕코털 대마왕코털 나쁜 마음이 들어 서서히 식당 출입을 자제하고 한동안 기숙사에서 컵라면을 질리도록 먹었다. 이로써 나는 기숙사에서 끼니를 대충 때우고 창문으로 기어 다니는 코리안 외노자로 등극했다.
Alex를 피해 기숙사에서 주구장창 라면만 먹으니 아껴먹던 라면도 동이 났다. 리조트에 일하면 2주에 한 번은 배 타고 육지로 나가 생필품을 사 왔다. 쇼핑몰이 있는 곳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깡시골이라 버스가 자주 없었다. 버스를 놓치게 되면 2시간을 기다리거나 택시를 타야 했는데 요금도 비싼 뿐 아니라 택시마저도 많이 없었다.
그 날은 기숙사 동생이랑 셀카 찍느라 꾸물거렸고 결국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한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를 계속 주시하던 호주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봤는데 버스를 놓친 거냐며 자기 아빠가 곧 픽업올건데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이유 모를 호의라 일단 의심과 불신을 품고 적대적으로 대했는데 이야기해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 리조트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섬에서 슈퍼바이저를 하고 있고 Kevin이라 했다.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 아름답다 고져스 프리티 뷰티풀 원더풀 풀풀풀 한국여자들은 다 너처럼 이쁘냐며 (...이건 내 망상) 입발린 칭찬을 마구 쏟아냈고 그 말에 솜사탕 녹듯 마음이 녹은 나는 어느새 경계를 풀고 Kevin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수다라 해봤자 호주 굿굿 리조트 굿굿 픽업 굿굿.
Kevin 아빠가 도착했고 노 프로블롬을 외치며 친절히 태워줬다. 미드 범죄 시리즈 CSI를 즐겨보는 나는 마음 한편으로는 끝없는 의심을 버리지 못해, 여차하면 언제든 차밖으로 뛰어내릴 마음으로 자동차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잡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그들은 우리를 쇼핑몰 앞에 안전하게 내려줬다. 감사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던 찰나에 Kevin이 나중에 돌아갈 때도 태워주겠다고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솔직히 부담도 되고 폐 끼치는 것 같아서 한사코 마다했지만 우리가 걱정된다며 (뭐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집요하게 굴었다. 차 안에서 계속 빵빵되는 Kevin 아빠가 신경 쓰여 동생은 그냥 빨리 번호 찍어주고 보내자고 했지만,
이 새끼 눈이 이상해.
눈빛이 뭔가 쌔한 느낌 들어 번호를 주기도 찝찝하고 안주기도 애매했다.
줄 때까지 안 갈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로 번호를 찍어줬고 그는 바로 내 눈앞에서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다. 소름이 돋았다. 가짜번호였으면 어쩔 뻔.
열심히 쇼핑을 하고 있는데 Kevin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담스러워 전화를 받지 않으니 몇 분 뒤 문자 하나가 왔다
'너네들 어디야. 지금 데리러 갈게'
그때까지만 해도 과잉친절이라 생각했다. '고맙지만 우리가 알아서 갈게. 헤브 어 굿데이' 더 이상 문자 보내지마의 의미로 마침표를 찍어 답장을 하고 또 쇼핑을 하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다 온 동생이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언니 Kevin 왔어."
깜짝 놀라 일단 옷가게로 들어가 유리창 밖 상황을 살피니 Kevin이 똥마려운 사람처럼 미친 듯 우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는 전화기가 계속 울렸다. 나와 동생은 공포를 느껴 Kevin을피해 그 비싸다는 시골택시를 타고 항구로 돌아갔고, 배 시간이 되기까지 항구 화장실에 숨어있었다.
리조트로 돌아가면 모든 게 다 끝일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늦은 밤쯤 돼서 Kevin에게 문자 폭탄이 왔다.
'넌 나와 우리 아빠를 이용했어. 벌 받을 거야.'부터 시작해
'왜 날 버렸니 우리 아까 즐거웠잖아'
'다시 생각해도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야'
...도대체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까지나 하나 싶었지만 그냥 똥 밟은 셈 치고 무시하고 넘어갔다.
아침이 되어 핸드폰을 보니 Kevin한테서 여러 개의 문자가 와있었는데
'미안해 내가 너무 화가 났나 봐 우리 괜찮지?'
'용서해 줘 정신이 나갔나 봐''지금 어디야 걱정이 된다'.
....무슨 지킬 앤 하이드 박사처럼 감정이 이랬다 저랬다.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동생이 문자를 계속 무시하면 리조트 찾아와 해코지할 것 같다고 겁줘서 일단 답장으로 '어제 미리 연락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너의 문자들이 나를 무섭게 한다''나는 지금 리조트에 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안심시켜 줬다.
그렇게 Kevin은 하루에서 몇 번씩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문자를 보냈고, 휴일 맞춰서 만나자고 끊임없이 데이트요청을 했다. 두발로 나가 송장으로 돌아올것 같은 두려움도 컸고 계속 이렇게 두다가는 조만간 내가 '그것이 알고싶다'의 주인공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4개월 만에 리조트에서 도망치듯 탈출했다. 아무 하고나 말 섞지 말자는 큰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호주 사람들과 눈만 마주쳐도 뭘 봐 이씨.고 투 헬.
나와 기숙사 동생은 계획 하나 없이 무작정 육지로 나갔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무는 동안 호주 전국 리조트에 되든 안되든 메일로 이력서를 쫙 돌렸다. 그러던 어느날, 꿈의 직장이라 알려진 리조트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고 인터뷰 날짜에 맞춰 비행기 타고 그 지역으로 미련없이 떠났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직원들을 앞에서 동영상을 찍게 되었는데...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