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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30. 2023

외노자 김씨, 호주땅을 밟다

나는 영어를 못했다.수능 영어는 6등급인가 7등급인가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대략 못했다. 그랬던 나는 외국에 나가 외국인들과 부대껴가면서 영어를 배웠고 이제는 영어 좀 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살고 있다. 외국에 가기 전에는 말 한마디 못하는 바보였다. 외국인이 말을 걸면 일단 부담스러워 뇌정지가 왔고 Sorry me no English를 연발하며 자리 피하기 일쑤였다.


대학 필수전공인 영어회화 수업에서는 C+를 받아 원어민 교수에게 아이킬유 유 다이 협박성 메시지를 날렸었. 물론 교수에게 불러갔지만 다행히 영어로 혼나서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대학생 4학년 무렵, 밤낮 틀어뒀던 해리포터 영화덕에 예상치도 않게 영어 듣기 실력이 좋아졌다영어질문에 어느 정도 눈치껏 때려 맞춰 알아는 들었지만 그에 걸맞은 적절한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한국 날씨는 외국에 비해 어떻냐'는 질문을 알아듣고는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나라로써 봄 인 현재는 날씨가 푸근하고 나들이 가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라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오는 서양말이라고는 코리아 웨덜 이즈 포. 나우 스프링 굿 나들이 굿굿. 

이것이 내 한계다 이놈들아.


자신감 넘치며 yeah, uh huh 연발하며 듣고 있던 나의 거만한 리스닝 태도에 비해 남 들을까 부끄러운 처참한 스피킹 수준이 항상 나에게 수치심을 안겼다. 그러다 갑자기 영어 학구열에 불붙어 필리핀 어학연수를 갔고 열심히 필리핀 선생님들에게 만수르처럼 금융치료를 베풀며 학원 안팎으로 수다를 떠는 덕에 신생아 수준의 영어 옹알이에서 외국 유치원생 수준으로 음식 주문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봤자 햄버거 굿굿 감자튀김 굿굿






필리핀 연수를 마치고 바로 호주로 건너가 한인 사장이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바리스타로 일한 적이 있어 일 구하기는 쉬웠지만 주문받는 게 어려웠다. 나름 리스닝은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상황에 부딪치니 달팽이관이 닫혀버렸다. 필리핀 선생님들은 영어 못하는 나를 배려해 천천히 기다려줬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차려 대화가 가능했지만 실전 영어은 전혀 다르다. 호주인들은 한국 외노자인 나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커피 한 잔 주문받는데 안면마비가 왔다. 얼굴은 정상회담 수준의 실력을 갖진거 마냥 진지했지만 주문을 받는 나의 양손을 경운기처럼 덜덜 떨고있었다.


호주인들에게 얼마나 내가 괴기스러웠을까. 고작 땡스 한마디를 말하는데도 긴장해 혀가 굳어 땡크s 라 발음한 적도 몇 번 있다. 뭐 굳이 상황극을 하자면, '커퓌ff 한좐 주세열 여기 4달러r 이씁니다' 의 대답으로 '눼 그것은 탱크입니다' 로 답한 셈이다. 전쟁을 선포한다 이놈들아.


외국인친구가 있으면 영어 실력이 자연스레 는다고 해서 커피숍을 자주 찾아오는 호주인들과 친해지려고 안 해본 짓이 없다. 내가 한국 사람인지 아는 몇 명의 단골들은 나를 볼 때마다 '갱남쓰타일' 이야기를 했고 (..아주 지겹도록)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강남스타일 말춤을 시도 때도 없이 몇백 번이고 췄던 것 같다. 그들 앞에서 재롱을 한 날이면 담배가 마려웠지만 다음 날이면 또 다 잊어버리고 옵 옵 옵빤 갱남쓰타일. 사랑합니다 고갱님.

뭐 대략 이런 느낌으로. 짜란다 짜란다 코리안 외노자 잘한다. 우쭈쭈.


그들은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해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노스코리아인 줄 알고 킴정일킴정은을 언급하면서 내 성이 킴이라는 걸 알고는 정일 딸이라며 굉장히 즐거워했다 (...도대체 왜) 나는 그들의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는 척 bangbang 쏴주고 한술 더 떠 수류탄 던지는 척 오바육바를 떨어주니 호주인은 아주 그냥 자지러지며 너 따봉 베리 따봉외쳐줬다. 여러분들은 영어는 그냥 돈 주고 어학원에서 배우세요. * 참고로 때는 2013년입니다.


그렇게 커피숍에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외국인들과 간단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영어가 재밌어졌다. 하지만 너무 한정적인 표현들만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맨날 오는 손님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은 식상하고 지루해져서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다양하고 많은 외국인을 만날 수 있는 대형 쇼핑몰 안에 있는 푸드코트에 일을 구했다. 돈을 벌 목적보다는 영어를 잘하고 싶었기에 힘든 일이라도 한번 부딪쳐보자 싶어 호기롭게 도전했는데 정말 이렇게까지 힘들고, 나의 손가락이 그렇게 짤릴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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