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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뜨거웠던 나의 여름

by 김분주

블루베리 농장일이 58일 만에 드디어 끝이 났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미리 뜨거운 여름을 경험했으며 몇 년 치 먹을 블루베리도 (몰래) 먹었으며 좋은 이모들과 좋은 인연도 맺었고 새벽 4시에 눈이 떠지는 습관을 얻었으며 생각보다 돈은 크게 벌진 않았지만 재밌고 힘든 경험을 한 걸로 나는 만족한다.



블루베리 일이 마칠 때쯤 이모들이 앞으로 나보고 뭘 하면서 먹고살 거냐고 묻길래 사실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모들은 작가슨생님이냐면서 기뻐해줬다. 적어둔 글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해서 브런치 글을 보여줬는데,

안 보여 안 보여.

검은 건 글씨고 흰 건 종이인 것만 알겠네. 호이짜호이짜.

글자가 작아 60대인 이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나보고 이모들 앞에서 낭독해 달라고 했다. 흠.


"제 글은 낭독할만한 글이 아닌데요..."

"그래도 한번 읽어봐 이모들이 들어보고 잘 될 수 있는지 판단해 줄게 자- 다들 박수 짝짝짝."

(짝짝 짝짝)


이모들의 성화와 미리 선불로 받아버린 박수갈채에 못 이겨 쭈볏쭈볏하며 나의 역작 중 하나인 청개구리 시리즈를 소리 내여 실감 나게 읽어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맛을 살려보자는 의미에서 아주 맛깔나게 높낮이조절+속도조절+1인 다역의 다양한 목소리변화를 주면서 생동감 있게 읽어 내려갔다. 읽는 내내 이모들의 반응이 궁금해 곁눈길로 이모들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들의 표정은,

아따 시방 도대체 뭔 개소리야.

요즘 젊은것들은 도무지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업쒀. 넌 안 되겠다. 그냥 블루베리나 따라 이년아.



힝.



블루베리 농장은 매번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배달시켜 먹는다. 처음에는 우와 진정한 시골밥상이다 싶어 뭔가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는데 2달 동안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반찬이 비슷비슷했다. 더위랑 싸우며 일하는 농장 일꾼들이 이렇게 먹고 어떻게 힘이 나는지 의문이었다.


매번 국 하나 반찬 5종이 배달됐는데 항상 똑같았다. 김치, 나물 4종류 혹은 김치 2종류 나물 3종류 혹은 김치 3종류 나물 2종류. 간혹 가다가 식당주인이 기분 좋으면 생선을 주곤 했는데 인원당 한 마리씩 돌아가지 않아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근데 또 특이한 건 밥은 엄청 많이 줬다. 10인분 밥상에 밥은 20인분 정도 되어 보였다. 식당 주인은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배고프면 맨밥도 꿀맛같이 느껴진다는 옛 속담을 굳게 믿고 있으신가 보다.


한 달 반정도 같은 반찬을 매일 먹은 이모들이 하루는 소심한 반항을 했다. 찍어먹을 반찬이 없어서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식당에 볼멘소리를 했고, 웬일인지 다음날 평소랑은 다른 색다른 메뉴와 국이 왔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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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가 싶은 노맛 잡채.

야채 0.00001%와 당면 99.99999 퍼센트의 조합으로 만든 잡채라 부르기도 민망한 걍 삶은 당면.

영자이모가 이 집 사장은 잡채집에 견학을 가서 잡채가 무슨 맛인지를 배워와야 된다며 한입 먹어보더니 바로 젓가락을 놓았다.


그래도 국은 다르겠지. 국은 맛있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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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희망고문. 오늘 국으로 오징어 한 마리가 목욕하고 나온 물이 나왔어요.

큰 냄비에 오징어 통마리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오징어를 자르는 걸 잊어버린 건지 아님 코로나도 종식된 마당에 13명의 인부들이 사이좋게 한입씩 베어 먹으라는 건지. 칼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통짜 오징어국은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이렇게 식당주인이 우리에게 빅엿을 먹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더 이상 식당 반찬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게 되었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것을 식당주인이 보여준 셈이다.

이제는 반찬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히 입 다물고 먹는다.


힝.



어딜 가든 사람이 많으면 은근 편이 나눠지는 것 같다. 여기 농장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이게 되고 그렇게 되다 보니 두 팀으로 나눠졌다. 서로 싸우거나 싫어하는 건 아닌데 자연적으로 조금씩 거리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A팀과 B팀 중에 나는 자연스레 같이 밥상을 공유하는 A팀에 속하게 되었다. B팀에 조금 밉상인 J이모가 계시는데 A팀 이모들은 그 이모가 입을 열 때마다 귀가 쫑긋해지면서 예민해졌다. 이곳에 일하면서 한 무리에 속하게 되면서 한 인간이 점점 동기화가 되는 과정을 몸소 깨달았다.


1주일 차

'J이모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A팀 이모들이 J이모 행동에 대해 수군거릴 때, A팀 이모들이 왜 이러실까 생각했다. 다들 J이모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주일 차

'오호라. 흥미로운데. 알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하긴 하네'

A팀 이모들의 J이모 뒷담화에 슬슬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3주일 차

'흠. J이모가 그렇단 말이지?'

A팀 이모들 말처럼 J이모가 좀...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 차

'세상에 마상에. 어머어머. 그 이모가? 내 그럴 줄 알았네'

A팀 이모들이 J이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옆에 앉아서 과한 리액션을 보탰다.


6주 차

'어머 저 사람 왜 저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별로네.'

J이모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주차

'이모들 이모들 세상에 오늘 J이모가 이리저리 해서 이렇게 저렇게 했어요. 암튼 이상해이상해'

나사가 풀어버린 것처럼 입이 제어가 되지 않고 A팀 이모들과 함께 신나게 J이모 이야기를 했다.


완 벽 적 응

이제는 J이모가 움직이기만 해도 예민해졌다.

결국 나도 동화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블루베리 농장에 물들어 갔다. 우리 엄마아빠가 나보고 블루베리 농장을 다니더니 인성이 이상해졌다고 했다. 몇 주 사이에 아지매처럼 성향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도대체 농장에서 이모들하고 뭘 하고 오냐고 나를 의심했다.


힝.




이제 정말 끝이 났다.

수많은 블루베리알들도. 몇십 동의 하우스도. 외국인 친구들도. 이모들도 이제는 없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제는 새벽기상을 할 필요가 없는데 여김 없이 3시 30분이면 뒤척이게 되었고 1시간마다 시계를 쳐다보며 지금은 쉬는 시간이겠네 지금은 점심시간이겠네 지금은 엄청 더울시간이겠네 라며 아직 블루베리농장 인체시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백수가 되니 하루가 길어서 지루해졌다. 앞으로는 뭘 또 해볼까. 뭘 해야 또 사는 게 즐거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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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삽목한 블루베리 묘목들이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블루베리농장 아르바이트도 끝이 났다.




+

긍정의 아이콘 미경이모가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보내준 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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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추상화.

이 정도 수준이면 아무나 찍어놓고 나라고 보내주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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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가장 뜨겁게 이 한 몸 불태웠다.

이 또한 추억이 되리라.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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