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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un 24. 2023

누구보다 뜨거웠던 나의 여름

블루베리 농장일이 58일 만에 드디어 끝이 났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미리 뜨거운 여름을 경험했으며 몇 년 치 먹을 블루베리도 (몰래) 먹었으며 좋은 이모들과 좋은 인연도 맺었고 새벽 4시에 눈이 떠지는 습관을 얻었으며 생각보다 돈은 크게 벌진 않았지만 재밌고 힘든 경험을 한 걸로 나는 만족한다. 



블루베리 일이 마칠 때쯤 이모들이 앞으로 나보고 뭘 하면서 먹고살 거냐고 묻길래 사실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모들은 작가슨생님이냐면서 기뻐해줬다. 적어둔 글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해서 브런치 글을 보여줬는데,

안 보여 안 보여.

검은 건 글씨고 흰 건 종이인 것만 알겠네. 호이짜호이짜.

글자가 작아 60대인 이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나보고 이모들 앞에서 낭독해 달라고 했다. 흠.


"제 글은 낭독할만한 글이 아닌데요..."

"그래도 한번 읽어봐 이모들이 들어보고 잘 될 수 있는지 판단해 줄게 자- 다들 박수 짝짝짝."

(짝짝 짝짝)


이모들의 성화와 미리 선불로 받아버린 박수갈채에 못 이겨 쭈볏쭈볏하며 나의 역작 중 하나인 청개구리 시리즈를 소리 내여 실감 나게 읽어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맛을 살려보자는 의미에서 아주 맛깔나게 높낮이조절+속도조절+1인 다역의 다양한 목소리변화를 주면서 생동감 있게 읽어 내려갔다. 읽는 내내 이모들의 반응이 궁금해 곁눈길로 이모들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들의 표정은,

아따 시방 도대체 뭔 개소리야.

요즘 젊은것들은 도무지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업쒀. 넌 안 되겠다. 그냥 블루베리나 따라 이년아.



힝.



블루베리 농장은 매번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배달시켜 먹는다. 처음에는 우와 진정한 시골밥상이다 싶어 뭔가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는데 2달 동안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반찬이 비슷비슷했다. 더위랑 싸우며 일하는 농장 일꾼들이 이렇게 먹고 어떻게 힘이 나는지 의문이었다.


매번 국 하나 반찬 5종이 배달됐는데 항상 똑같았다. 김치, 나물 4종류 혹은 김치 2종류 나물 3종류 혹은 김치 3종류 나물 2종류. 간혹 가다가 식당주인이 기분 좋으면 생선을 주곤 했는데 인원당 한 마리씩 돌아가지 않아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근데 또 특이한 건 밥은 엄청 많이 줬다. 10인분 밥상에 밥은 20인분 정도 되어 보였다. 식당 주인은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배고프면 맨밥도 꿀맛같이 느껴진다는 옛 속담을 굳게 믿고 있으신가 보다. 


한 달 반정도 같은 반찬을 매일 먹은 이모들이 하루는 소심한 반항을 했다. 찍어먹을 반찬이 없어서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식당에 볼멘소리를 했고, 웬일인지 다음날 평소랑은 다른 색다른 메뉴와 국이 왔다. 그것은,

이게 뭔가 싶은 노맛 잡채.

야채 0.00001%와 당면 99.99999 퍼센트의 조합으로 만든 잡채라 부르기도 민망한 걍 삶은 당면.

영자이모가 이 집 사장은 잡채집에 견학을 가서 잡채가 무슨 맛인지를 배워와야 된다며 한입 먹어보더니 바로 젓가락을 놓았다. 


그래도 국은 다르겠지. 국은 맛있을 게야.

그것은 희망고문. 오늘 국으로 오징어 한 마리가 목욕하고 나온 물이 나왔어요.

큰 냄비에 오징어 통마리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오징어를 자르는 걸 잊어버린 건지 아님 코로나도 종식된 마당에 13명의 인부들이 사이좋게 한입씩 베어 먹으라는 건지. 칼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통짜 오징어국은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이렇게 식당주인이 우리에게 빅엿을 먹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더 이상 식당 반찬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게 되었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것을 식당주인이 보여준 셈이다.

이제는 반찬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히 입 다물고 먹는다.


힝.



어딜 가든 사람이 많으면 은근 편이 나눠지는 것 같다. 여기 농장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이게 되고 그렇게 되다 보니 두 팀으로 나눠졌다. 서로 싸우거나 싫어하는 건 아닌데 자연적으로 조금씩 거리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A팀과 B팀 중에 나는 자연스레 같이 밥상을 공유하는 A팀에 속하게 되었다. B팀에 조금 밉상인 J이모가 계시는데 A팀 이모들은 그 이모가 입을 열 때마다 귀가 쫑긋해지면서 예민해졌다. 이곳에 일하면서 한 무리에 속하게 되면서 한 인간이 점점 동기화가 되는 과정을 몸소 깨달았다.


1주일 차

'J이모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A팀 이모들이 J이모 행동에 대해 수군거릴 때, A팀 이모들이 왜 이러실까 생각했다. 다들 J이모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주일 차

'오호라. 흥미로운데. 알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하긴 하네' 

A팀 이모들의 J이모 뒷담화에 슬슬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3주일 차

'흠. J이모가 그렇단 말이지?'

A팀 이모들 말처럼 J이모가 좀...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 차

'세상에 마상에. 어머어머. 그 이모가? 내 그럴 줄 알았네'

A팀 이모들이 J이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옆에 앉아서 과한 리액션을 보탰다.


6주 차

'어머 저 사람 왜 저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별로네.'

J이모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주차

'이모들 이모들 세상에 오늘 J이모가 이리저리 해서 이렇게 저렇게 했어요. 암튼 이상해이상해'

나사가 풀어버린 것처럼 입이 제어가 되지 않고 A팀 이모들과 함께 신나게 J이모 이야기를 했다. 


완 벽 적 응

이제는 J이모가 움직이기만 해도 예민해졌다. 

결국 나도 동화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블루베리 농장에 물들어 갔다. 우리 엄마아빠가 나보고 블루베리 농장을 다니더니 인성이 이상해졌다고 했다. 몇 주 사이에 아지매처럼 성향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도대체 농장에서 이모들하고 뭘 하고 오냐고 나를 의심했다.


힝.




이제 정말 끝이 났다.

수많은 블루베리알들도. 몇십 동의 하우스도. 외국인 친구들도. 이모들도 이제는 없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제는 새벽기상을 할 필요가 없는데 여김 없이 3시 30분이면 뒤척이게 되었고 1시간마다 시계를 쳐다보며 지금은 쉬는 시간이겠네 지금은 점심시간이겠네 지금은 엄청 더울시간이겠네 라며 아직 블루베리농장 인체시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백수가 되니 하루가 길어서 지루해졌다. 앞으로는 뭘 또 해볼까. 뭘 해야 또 사는 게 즐거워질까.


내가 삽목한 블루베리 묘목들이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블루베리농장 아르바이트도 끝이 났다.




+

긍정의 아이콘 미경이모가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보내준 내 사진.


이것은 추상화.

이 정도 수준이면 아무나 찍어놓고 나라고 보내주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올 여름 가장 뜨겁게 이 한 몸 불태웠다.

이 또한 추억이 되리라.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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