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나의 꽃같던 청춘이 한참 피어나던 20대 초반이다.
친구의 대학교 복학으로 꿀빤다는 커피솝 아르바이트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친구가 나를 꾸역꾸역 밀어넣어줬다. 커피숍 J사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프랑스 아방가르드 st의 고급진 인테리어로 꽤 이름이 알려진 개인 커피숍을 재미로 운영하던 분이었다. 당시 40대 후반의 여사장님으로 바이올린을 하는 외동아들에 남편의 유무를 알 수 없는 돈 많은 싸모님이셨다. 항상 숏커트 머리에 스모키화장, 퍼스널컬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프리카 원주민급의 베이비핑크색 립스틱을 바르고 킬힐에 명품을 휘감고 다니셨다. 정 많고 다정했지만 뭔가 단순하고 뇌가 순수한 분이셨다.
J사장님은 먹는 거에 대해서는 아끼지 않는 인정많은 사람으로 카페에 파는 음료는 무한정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해 줬다. 하루는 나랑 사장님이랑 식빵을 먹고 있는데 사장님이 식빵 테두리 갈색 부분은 다 뜯어 버리고 가운데만 먹는것이었다,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까워서 아무 생각 없이 주워 먹었다.
며칠 뒤, 이틀 쉬고 늦게 출근을 했다. 오전 알바생이 사장님이 나 주라고 두고 갔다며 검정 봉지를 내밀었는데! 그 안에는 식빵 끝 부분만! 한가득! 뭉직하게 한소쿠리! 음식물 쓰레기 모아둔것 처럼 들어있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이게 뭐냐니까 아르바이트생이 이틀 동안 갓 구운 우유식빵을 간식으로 먹었는데 내가 끝부분만 좋아한다 해서 알바생이랑 사장은 야들야들하고 촉촉한 가운데 흰 부분만 뜯어먹고 퍽퍽한 모서리 부분만 나를 위해 모아놨다며 나에게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장년이.
고차원적으로 나를 엿먹이는 건지 진심으로 위한 건지.
본인 출근 하자마자 나를 위해 애써 빵 모아둔거 봤냐며 마치 생선 대가리만 먹는 어머니에게 대가리만 한가득 준 효녀가 된 거 마냥 의기양양하던 모습이 어찌나 꼴뵈기 싫던지. 요플레 뚜껑에 묻은 요플레를 핥았으면 뚜껑만 한트록 모아 줄 사장년임은 틀림없다. 그나마 식빵이여서 다행이었다.
가끔 사장은 나에게는 친한 친구라고 소개해줬지만 누가 봐도 불륜관계임이 틀림없는 인테리어 사장아저씨를 자주 가게로 데리고 왔다. 둘이 애인관계인걸 알았지만, 가게에 오면 어린 나에게 용돈도 주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나도 그 아저씨가 놀러 오는 게 좋았다. 둘만의 러브스토리를 사장은 굳이 (...궁금하지도 않음) 무용담처럼 이야기해주곤 했는데 그 부자 아저씨를 호시탐탐 노리는 미씨들이 많아 본인이 불안하다는 말을 늘상 했다. 그래서 항상 사장님은 예쁜 모습,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꽤나 노력했다.
나에게 본인의 멋지고 지적인 모습을 그 아저씨한테 넌지시(강제적으로) 말해달라고 무언의 압박을 했고, 나도 열심히 맞장구쳐서 사님을 여러 번 비행기 띄워주곤 했다. 칭찬이 마음에 들면 점심 메뉴가 김밥에서 치즈돈가스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한 뒤로 나는 아저씨 올 때마다 새치혀를 놀리며 칭찬할 타이밍을 호시탐탐 노리곤 했다.
아 더러운 세상이여.
하루는 둘이 다퉜는지 사장님이 우울하게 앉아서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덕지덕지 처발라, 생크림을 불국사 3층 석탑처럼 가득 올라간 카페모카를 곁들여 쩝쩝 거리며 먹고 있었다. 때마침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나보고 받으라고 본인 전화기를 밀면서, 본인이 많이 아프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힘없이 그냥 멍하니 힘겹게 앉아 있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응?
나는 기름에 튀긴 빠삭한 경양식 돈가스를 먹을 생각에 사장님이 출근 때부터 기분도 안좋고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안하셔서 걱정돼 죽겠다고 말하고는 사장님에게 전화를 다시 토스했다. 둘이 통화를 길게 하더니 사장님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갑자기 기분이 업되서 오늘 점심으로 새로 개업한 초밥집에서 한상 거하게 시켜 먹자고 콧노래를 불렀다.
손님 없는 시간에 맞춰 주문한 초밥과 우동, 돈가스가 배달되었다. 포장비닐을 벗겨 카운터 간이 테이블에 세팅을 다 했는데 그때 마침 아저씨가 걱정된 얼굴로 꽃다발과 죽을 사들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사장이 오랜만에 초밥 먹는다며 야무지게 간장에 고추냉이를 휙휙 섞고 있다가 아저씨가 가게에 들어온 모습을 보고는 벌떡 일어서서는 갑자기 불치병 환자로 된 것처럼
자.. 자기... 왔어... ?
힘없이 말함과 동시에 나에게 왼손을 저으며 테이블을 숨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는 어질어질해하면서 손을 이마에 집고는 걸어 나갔다. 나까지 안 먹을 필요는 없었는데 그냥 무작정 숨기라는 눈빛을 보냈다 힝. 아저씨에게 카페라테를 서빙하면서 둘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아저씨는 사장님의 얼굴을 매만지며 안 본 사이에 못 먹어서 홀쭉해졌다고 (응?) 보고 싶어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미안하다고는 손잡고 아주 쇼를 하더라.
안본눈 삽니다.
이 정도면 공공장소 풍기문란죄 이올시다.
나는 먹지도 못하고 안 먹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참다참다 안되서 힘껏 고개를 거북이처럼 쭉-빼고 몸을 움크린채로 돈가스를 맨손으로 주워 먹었다 흑흑. 이미 우동은 국물을 빨아드려 곰장어처럼 통통하게 불었고, 보초서는 미어캣처럼 전방을 주시하면서 급하게 주워 먹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그들의 사랑에 내가 왜 고생해야 하나 싶어 서러움이 밀려왔다. 사장이 슬슬 배고팠는지 카운터로 볼일 있는 것처럼 잠시 와서는 아까의 나처럼 쭈그려 앉아 아저씨 눈치를 보며 원샷 투초밥 스킬로 초밥을 2개씩 입에 밀어 넣고는 내 옆에서 나란히 같이 미어캣이 되었다.
카운터에 오래 머물면 아저씨가 이쪽으로 쳐다볼것 같은 초급함에 나도 모르게 사장님 아저씨 핸드폰 보고 있어요 사장님 아저씨 여기 쳐다봐요 사장님 아저씨 올 것 같아요 스포츠 생중계처럼 상황보고를 해줬다. 이 정도면 시급 5만 원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아저씨가 떠나고 사장님은 불어 터진 우동면발을 그릇째 원샷때렸다. 씹지도 않고 우동면을 목구녕에서 위장으로 다이렉트로 밀어 넣었다고 해야 하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만 정내미가 떨어져 이 짓도 못할 짓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이 밥 제대로 못 먹게 해서 미안하다며 준 3만 원에 내 마음이 눈 녹듯 샤르르 녹아버렸다.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은 날이다.
아저씨와 사장님이 또 데이트를 했다.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카페라테를 마시고 사장님은 키위주스를 마셨다. 둘이서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고는 카운터로 왔는데 사장 윗니에 쌔까만 키위씨가 개미처럼 이곳 저곳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괴기스러워. 거울에 비친 본인 까만 이빨을 보고는 나보고 미리 말안해줬다고 삐져서 일주일 정도 말 한마디를 안 했다. 나는 미안함에 아저씨한테 사장님이 얼마나 아저씨를 좋아하는줄 아냐고 또 알랑방구를 껴줬고, 아저씨는 사장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하여 향수를 선물 해줬다고 한다. 한동안 그 향수냄새가 커피솝에 진동해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지만 해고 당하지 않음에 감사했다.
돈벌기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