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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May 15. 2023

블루베리 농장의 이모 어벤져스

블루베리 농장은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요지경세상의 축소판이다.

농장은 크게 두 팀으로 나눠지는데 농장패밀리팀과 수확시즌 때 블루베리를 따러온 아르바이트 이모님 팀이다. 나는 수확조로 이모님 무리들과 오글오글 하루종일 붙어서 같이 다닌다. 그들은 정도 많고 말도 많다. 자기들끼리 오늘은 친구가 되었다가 내일은 적이 되는, 그러면서 챙길 건 다 잘 챙겨주는 얽히고설킨 복잡 미묘한 관계다.


2주 관찰한 결과 이모들은 정말 농장일을 내 가족일인 것처럼 진심으로 열심히 일한다. 어느 하나 농땡이 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농장에 도움이 되고자 본인들을 희생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농장 블루베리는 유난히 더 달고 소중하다. 내가 농장주라면 블루베리계의 어벤저스 이모들의 름름한 모습만 봐도 든든할 것 같다. 12척의 배로 왜놈들을 무찌른 이순신 장군님처럼 농장주에게는 열 명의 이모들이 있기에 한 해 농사가 잘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3명의 이모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1. 블루베리 빌런 영자이모.

블루베리 첫 수확 때는 과일값이 비싸다. 농장주도 우리 보고 조심해서 잘 익은 것만 따라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혹여나 실수로 덜 익은 걸 따거나 익은 걸 따려다가 저절로 땅에 떨어질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눈치껏 입속으로 직행하면 된다. 단 일부러 크고 좋은걸 막 먹으면 안 된다. 특히나 난 졸보ㅅㄲ라서 몰래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안 먹는다. 사실 하루종일 블루베리만 8시간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고 일하고 있으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싸-악 사라진다. 특히 내 혀는 값싼 외국산 냉동블루베리에 익숙해져 있어 갓 딴 생블루베리는 뭔가 싱겁고 미지근하고 밍밍하다.  


같은 조에 있는 영자이모는 호탕하고 순수한 분이다. 특히나 블루베리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주변에서 절대 많이 자주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이모는 저절로 중력에 의해 땅에 떨어진 거라 개미밥이 될 바에 본인 뱃속에 넣겠다고 낼름 주워드신다. 새들이 날아와 반쯤 쪼사먹다 버린 것도 낼름. 쥐가 갉아먹었다고 낼름 (농장에 쥐 없음) 고라니가 밟고 지나갔다고 낼름 (농장에 고라니 없음) 메뚜기가 먹었다고 낼름 (농장에 메뚜기 없음) 뱀이 또아리를 틀었다고 낼림(농장에 뱀 없음) 이리 낼름 저리 낼름. 참 많이 좝수신다. 본인말로는 블루베리 몇 알 덕분에 허리도 부드러워졌고 잠도 잘 자고 입맛도 돋고 관절도 안 아프고 키도 크고 머리숱도 많이 난 것 같다고 참 좋다고 한다. 나도 몇 개 먹었는데 눈은 밝아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몰래 먹어서 그런가. 약효가 좋긴 한 것 같다.


하루는 작업반장삼촌이 영자이모가 몇 번 낼름 먹는 걸 봤는지 조회 시간에 이모들에게 블루베리 먹고 싶으면 선별하다가 상처가 나거나 상품으로 팔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들을 주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삼촌 본인은 블루베리를 24시간 끼고 살아서 눈이 몽골인만큼 잘 보여 개미 똥구멍까지 볼 수 있으니 누가 블루베리를 계속 몰래 먹는지 다 알고 있다고 조심해 달라 했다. 분위기가 싸했다. 많이 먹지 않은 이모들만 움찔하고 눈치를 봤고 정작 영자이모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작업반장이 떠나고 다른 이모님들이 단체로 영자이모에게 제발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모는 알겠다고 본인은 정말 짐승이 먹고 버린 것만 주워 먹는다 했다. 그리고 또 있지도 않은 개미, 고라니, 메뚜기, 뱀 변명 돌려 막기.


아침에 쓴소리 한 게 미안했는지 작업반장이 일꾼들 먹으라고 팥빵을 사들고 왔다. 다 같이 휴게실에 모여서 작업 마스크를 벗는데 모든 시선이 영자이모에게로 쏠렸다. 영자이모는 얼마나 블루베리를 집어먹었는지,

입 주변 푸릇푸릇.

누가 봐도 나 블루베리 낼름낼름 존나 먹어-써여.


영자 이모 입 주변이 새파랬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웃는 영자이모의 치아 사이사이에 미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한 블루베리 과육들이 불개미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 영자이모. 왜 그러셨어요. 또 좝수셨네요.

이모는 그날로 마스크 금지령을 받고 쌩얼로 반장삼촌과 짝이 되어 8시간 내내 감시를 받았다. 더 이상 영자이모는 블루베리를 집어먹지 못하고 며칠 내내 새하얀 옥색 치아를 유지했다.  



2. 산짐승 말숙이모. 

농장에는 화장실이 없다. 허허벌판에 비닐하우스만 덩그러니 놓여있어서 이모들은 풀이 우거진 들판에서 볼일을 대충 해결한다. 더워서 물을 많이 마시지만 대부분 땀으로 배출되어 사실상 화장실에 자주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들 화장실 문제가 신경 쓰여 미리 출근 전 집에서 큰일은 해결하고 오는 편이라 했다.


하루는 말숙이모가 아침부터 본인 아들이 크고 싱싱한 전복을 사 와서 전날 저녁에 맛있게 먹었다고 계-속 아들 자랑을 했다. 전복이 어찌나 싱싱하고 비싼지부터 시작해 우리 아들은 돈을 쓸-데없는곳에 쓴다면서 본인에게 너어어어어무 잘하고 용돈도 잘 주고 어쩌고 저쩌고 몇 시간가량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하필 말숙이모가 내 뒤에서 과일을 따는 바람에 나만 이모 이야기를 듣는 억울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냥 이모가 내 귀에만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말숙이모가 외마디 짧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배를 부여잡고 비닐하우스 밖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나만 봤다.


7분 뒤쯤 말숙이모가 상당히 상쾌표정으로 돌아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몸이 가벼워 보였다. 그리고 또 나에게만 들리게끔 전복이야기를 또또또 사골 우리듯 우려먹었다. 잠시 뒤, 쉬는 시간이 되어 모두들 하우스 밖으로 나왔고 들판에 소변을 보러 나갔던 혜란이 이모가 화들짝 놀라며 휴게실로 호다닥 뛰어들어왔다. 소변을 누러 가는 전용 들판에 커다랗고 굵직한 똥 여러 무더기를 봤다 했다. 블루베리 농장에 멧돼지가 출몰해서 땅을 파놓고 간다는 농장주 말을 듣긴 했는데 똥 모양새를 보아하니,

똥구멍이 예사롭지 않은 큰 놈인 거 같다면서 위험하니 앞으로 소변 누러 갈 때 짝을 지어서 서로 망을 봐주자고 했다. 흠.

* 위의 사진은 개그맨 유세윤 님의 염소분장입니다. 말숙이모 아닙니다.


나만 진실을 알고 있다. 혜란이 이모가 본 그것들은 똥구멍이 큰 산짐승 것이 아닌 어젯밤 말숙이모가 잘난 금쪽같은 내 새끼 우리 아들 우쭈쭈에게 야무지게 얻어먹은 전복의 최후라는 것을. 아들자랑으로 시종일관 떠들어댔던 말숙이모는 그날 하루 아주 조용히 일했다. 오랜만에 느껴본 조용한 평화였다.

 


3. 저세상 이야기꾼 순이이모.

순이이모는 블루베리 알바계의 왕언니로 입담이 화려하다 아니 화려하다 못해 맵다 매워. 아무도 순이이모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대략 70대 중반 이신 것 같다. 33도가 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도 순이이모는 지치지 않고 잘 견디신다. 어릴 때부터 밭일을 해 농장일은 뭐든 자신 있고 현재까지도 용돈벌이 삼아 이집저집 손을 거든다고 했다.

 

순이이모는 매년 사람들에게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안 좋고 현기증이 나서 더 이상 일 못해먹겠다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블루베리 농장에서 졸업한다 말만 하신 지가 벌써 5년째라고 한다. 힘들어죽겠다 더워죽겠다 입맛 없어죽겠다 입버릇처럼 말한다.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다들 수고했다고 내일 보자고 인사하면 순이이모는 내일 아침 눈이나 뜰 수 있으면 농장에 나오고 못 뜨면 저세상에서 지켜보겠다고 낄낄 거리지만  가슴은 철렁한다. 왠지 정말 그럴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조마조마하다. 그래서 매일 아침 출근길에 순이이모가 없을까 봐 걱정하면서 시작한다.


이모는 공포 개그를 항상 서슴지 않고 하는데 벌에 쏘이면 소주를 대충 처바르고, 남은 소주는 병나발 불고 기절한 듯 자면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농장에 뛰어다니는 두꺼비 오줌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된다고 이모들이 걱정하면 순이이모는 그런 걱정할 필요 없이 눈에 오줌이 들어가면 조용히 저세상 가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하우스 안이 너무 더워 젊은 남자가 따라오라고 손짓하면 그 길로 그냥 따라가라고 한다.

아 물론 그 젊은 남자는 저승사자.

이쯤 되니 난 순이이모가 무섭다. 이모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되면서도 걱정도 되고. 나도 모르게 이모 입만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매일 매 순간 매초마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만 내 눈에는 순이이모는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오래 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점심참 먹을 때마다 이런 거 먹어서 뭐 하나 어서 영감 따라 하루빨리 하늘나라 소풍 가야지 아이고 아이고 하시면서 은근히 비싸고 건강한 반찬만 쏙쏙 골라 드신다. 심지어 여러 차례 핸드폰 알람이 울리는데 그 시간에 맞춰 챙겨 먹는 건강보조제만 열개가 넘는다. 앞으로 10년은 더 블루베리 따리 나오실 생각이신 듯하다. 영감님 만나러 가기에는 아직까지는 블루베리일이 더 재밌으신가 보다.



는 우리 팀 모든 이모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요즘 새삼 느낀다. 30대인 젊은 나도 하우스 안에서는 힘들고 지치는데 50-60대 이모들은 어떻게 견디시는 걸까. 엄마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자식들 살림에 보태고 싶기 때문에 그들은 견딘다. 가족이 삶의 이유가 되지만 또 한편으로 가족이라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이모들은 주어진 하루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고단히 살고 계신다.

 

우리 이모들은 나에게 젊은 처자가 이런데 와서 고생한다며 좋게 봐주시고 잘 챙겨주신다. 최고의 며느리감인데 왜 아직 결혼 안 했냐며 살림도 척척 잘할 것 같다고 나를 볼 때마다 칭찬 일색이지만 정작 본인 아들은 소개해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허허. 내 아들은 안줘못줘. 그냥 남의 집 며느리로는 백점인 나란 여자. 본인 며느리로 좋다고는 말 안 했다 힝.

40일 뒤면 우리 이모들 못 볼 텐데 벌써 아쉽다. 우리 끝까지 잘해봐요.

이모들은 가족의 희망이니까요.

블루베리 조지러 가는 농장의 아줌마 부대. 자랑스러워요.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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