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4
누님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서울의 총신대학교 정원에서 찍은 것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사진이었다.
시골에서 교회에 다니던 나는 총신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합창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서울에 살고 있던 누님 둘이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가 함께 찍은 것이었다.
사진을 어디서 구했냐고 물었더니 '지금 옛날 사진을 정리하며 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을 버린다고?
시간을 멈추고, 바로 그 멈춘 시간을 미래로 이어놓고 싶은 욕망에 열심히 셔터를 눌렀지만
이제는 사진을 버려야 할 시간인가.
'사진도 버려야 하는 날이 오는군' 하고 답장을 보냈더니
'반 넘게 버렸다. 조금은 남겼다가 나중에 또 버려야지. 한꺼번에 버리자니, 추억을 버리는 거 같아 섭섭하다'는 답장이 되돌아왔다.
몇해 전 퇴직하기 전에, 나의 사랑이었던 책들을 버리면서 생각했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현재를 즐길 뿐이다.
내일은 모르거나 없고, 어제는 바꿀 수 없으니 내 것이 아니다.
나의 백년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고, 기억된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젋은 날의 사랑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다.
박인환은 그의 시 <세월이 가면>에서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다'고 노래했지만
이제 먼저 떠난 사랑 뒤로 '옛날'조차 자취없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종종 궁금하다. 내가 죽으면 운영하던 블로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이십여년에 걸쳐 썼던 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의 외동딸은 인생이 힘들 때, 한번쯤 아빠의 블로그에 방문할 것인가.
글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리워할 누군가가 필요해서일거다.
그렇게 힘든 삶의 한 순간을 버틸 수 있다면 내가 남긴 글은 충분히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손자에게 할아버지의 블로그는
중세의 역사처럼 덤덤하게 잊혀질 것이다.
누님은 사진의 절반을 남겨놓았다고 했는데
머지 않아 자의로, 타의로 그 사진들마저 폐기되는 날들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때쯤 이 세상과 이별하고
남은 사람들은 또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들뜬 열망으로 셔터를 누를 것이다.
오늘,
그리고 길지 않은 내일을 위하여.
#사진#늙음#쓸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