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5
자동차가 밀집되어 있는 곳을 지나다가
승용차 한 구석을 긁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지요.
잠시 후 20대 후반의 남성이 현장으로 나왔습니다.
전후사정을 이야기했죠.
공업사에 가서 흠집을 지워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앳되보이는 사내는, 괜찮아요, 어차피 금방 폐차할 거였어요, 라고 대꾸했습니다.
기분좋게 집에 왔습니다.
약품으로 지워도 없어질 정도의 작은 흠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내의 시원스런 너그러움에 감사했습니다.
저녁,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사내였죠.
공업사에 가보니 흠집을 없애는데 20만원이 든다는 거였습니다.
낮에 만났던 사내의 음성과 달리 단호한 추궁 같은 것이 담겨 있었죠.
분명 폐차할 예정이라고 했었는데요.
그렇다고 폐차할 예정이라면서요, 라고 물을 순 없었어요.
사내는 좋은 마음으로 집에 갔을 거예요.
친구, 동료를 만났을 수도 있겠죠.
당사자가 아닌 그들은 좀더 이득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충고했을 거예요.
충고는 언제나 즐거운 우월감을 주는 법이니까요.
사내가 처음 나에게 보였던 호의는 거의 본능적인 넉넉함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의 스크래치를 바로 돈으로 등식화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거라고 봐요.
스크래치란 누구에게나 허용될 수 있는 분량의 실수일테니까요.
그런 정도의 실수는 누구라도 용서하고 싶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도 언제든지 그런 실수를 할 수 있고, 바로 그때 용서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보험으로 처리하기는 번거로웠어요.
그렇다고 그 작은 흠집 때문에 20만원이나 주는 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했죠.
결국 10만원을 송금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자동차끼리의 간단한 접촉을 문제삼지 않고 기분좋게 헤어졌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연락이 오는 경우 말이에요.
- 왜 바보같이 굴어? 이럴 때 조금이라도 뜯어내는 거야.
돈 몇푼이라도 뜯어내라는 주변 지인들의 충고는 솔깃하게 마음에 와 닿았을 거예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그런 충고가 꼭 잘못된 것 같지도 않거든요.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책이 생각났습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Moral man Immoral society>라는 책 말이에요.
인간은 개인일 때 도덕적이지만, 모이면 비도덕적이게 된다는 말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어떤 집단에 소속되면 집단적 이기주의를 품는다는 뜻이죠.
그러고 보면 집단 이성이라는 것이 꼭 옳은 것 같지는 않아요.
개인의 양심이나 판단이 옳을 때도 아주 많은 것 같거든요.
단지 수치화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요즘엔 양심이라는 것이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결국은 서로서로 살기가 힘들어지겠죠.
작은 스크래치에도 이성의 교활함에 기대야 하니까요.
자신도 누군가의 차에 스크래치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리구요.
#스크래치#실수#관용#용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