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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May 12. 2021

식물의 힘

4월이 되면 스 울타리에 넝쿨 식물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3월 내내 했다. 넝쿨로 둘러쳐진 울타리는 상상만으로도 신나고 기쁜 일이었다.  

마침내 4월! 

인터넷과 여기저기서 귀동냥한 식물들을 그야말로 ‘내 맘대로’, 어떤 것은 씨를 뿌리고 어떤 것은 모종으로 이식했다.   

  

 쪽으로 둘러진 펜스 아래로, 훌쩍 자라 펜스를 넘어 설 그림을 그리며 해바라기 씨를 뿌리고, 놀고 있던 커다란 화분에 넝쿨장미를 심었다.  옆쪽으로 둘러진 스 밑에는 한련화와 나팔꽃을 심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담장을 따라 나팔꽃이 탐스러웠던 집이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늘 나팔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팔 같이 생겨서 나팔꽃인가 봐. 나팔이 없었을 더 옛날 옛날에는 뭐라고 했을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이 빛이 바래지지 않는 칼라사진처럼 오래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내게는 나팔꽃이 그랬다. 나팔꽃 씨를 사면서 엄마와 미아리를 떠올렸다.   

   

잔디밭 옆쪽으로는 흙마당이다. 보는 사람마다 아까운 땅을 놀리나며 텃밭을 일구라 했다. 귀 얇은 나는 당장 텃밭에 무엇을 심을지 고민에 들어갔다.

      

날짜를 꼽아가며 기다리다 장이 서는 날,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장터 끝 쪽에 자리를 펼친 모종상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대부분 한눈에 봐도 농부가 아니다. 텃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뜻 밖에 많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즐비하게 펼쳐져 있는 모종들에 또 한 번 놀랐다.

모종 화분은 초콜릿 틀처럼 되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다. 가로세로 높이 모두 2센티미터쯤 되는 정육면체 칸 20개 정도가 하나의 틀을 이루고 있다. 칸 하나에 모종 하나다. 모종 5개를 달라고 하면 모종 장사는 5개의 칸을 가위로 쓱쓱 오려내 손님에게 건넸다. 틀의 칸칸마다 씨를 뿌려 발아를 시킨 모양새인데 한 칸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내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상추, 깻잎, 고추, 가지, 대파, 방울토마토, 그리고 옥수수.

비슷하게 생긴 엽체류 가운데서 고르는 기준은 ‘익숙함’이고 다음은 ‘그냥’이다. 옥수수는 두 개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약간의 객기였던 것 같다.      


텃밭에 모종삽으로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금을 긋고 꼭짓점마다, 흙을 조금 파내 모종을 심고 다시 파낸 흙을 덮는 식으로 이식을 했다. 꽃병에 꽃을 꽂는 정도는 확실히 아니어서 다 하고 나니 허리가 아팠다. 하지만 일어나서 허리를 펴며 둘려보니-

 

하! 가슴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


농부는 이런 맛에 농사를 짓는 걸까?     

내친김에 마당 한쪽에 사과나무도 심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발걸음이 저절로, 텃밭으로, 심어놓은 나무에게로, 씨를 뿌린 자리로 향했다. 하루 만에 무슨 변화가 있을 리도 없다. 어제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도 자꾸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이렇게 나를 이끌었던 대상이 있었나?

나는 순수한 사람이었나...?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어느 날, 땅을 비집고 나오는 손톱만 한 새순이 보인다. 상추가 조금 자란 느낌이 든다. 그런 때는 젖살이 포동포동한 아기를 볼 때처럼 소중하고 대견스러워 혼자 행복하다.    

  

뜰에서 얻는 기쁨은, 이번 달 수입이 지난달보다 높다든가,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왔다든가, 건강검진 결과가 잘 나왔다든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식물의 힘이었다.

이기심이 제거된 인간의 태고의 감정이 있다면 이런 것일 것 같았다.

태고의 감정은 때로는 기쁨이고, 때로는 위로, 때로는 감동이었다. 어떤 불순물도 없었다.


조금 고될 수도 있는 노동을 기꺼이 감하는 것 역시 식물의 힘임이 분명다.    

   

이제 하루에 한 번씩 마당에 나가는 일과가 자연스럽다. 잔디와 텃밭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금세 한두 시간이 지나간다. 이웃이나 행인들이 자연스럽게 농작물 지식을 전해주고 간다. 그들을 통해 밭에 검은 비닐을 씌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검은 비닐뿐 아니라 밭을 갈아야 하고 이랑을 내야 하는 것도 알았다.

“텃밭도 한 3년은 해봐야 뭔가 좀 알게 돼

가장 가까운 위치의 이웃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는 나도 땅을 갈고 이랑도 내고 검은 비닐도 씌어서 텃밭을 일궈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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