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줄 까맣게 몰랐다.
이정하, 눈이 멀었다
영화〈블라인드〉에 대한 왓챠피디아 코멘트 란에 JJ 님이 소개한 시이다. 흔히들 '눈 먼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이 영화는 정말로 '눈 먼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눈 먼 사랑은 1) 눈이 멀어야 하고, 2) 사랑이어야 한다.
눈이 먼다는 것은 색에 비유하자면 환한 색도 될 듯하고, 아주 까만 색도 될 듯하다. 이 영화의 초반에 루벤은 커튼을 모두 친 어두운 방에서 지냈다. 눈 먼 그의 세상은 까맣다. 그러나 마리를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그의 세상은 환해졌다. 눈 내린 바깥은 온통 희고, 하얗고, 환하다.
마리는 아름답지 않다. 마리를 처음 보았을 때 루벤은 놀란듯 저도 모르게 숨을 작게 들이쉬었다. 그는 마리에게 아름답다고 했지만, 마리는 믿지 않았다. 마리 말대로 루벤의 '눈'에는 마리가 아름답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루벤의 손끝에서 마리는 아름다웠다. 온통 희고, 하얗고, 눈이 부시게 환한 마리를 루벤은 시각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감각으로 보았다. 냄새를 맡고, 목소리를 듣고, 손과 입술로 어루만지면서. 루벤은 마리의 냄새가 좋다고 했고 마리의 흉터를 얼음꽃이라고 표현했다.
이 영화는 눈이 먼 상태를 오히려 시각적으로 표현한 반면 아름다움은 시각이 아닌 다른 모든 감각으로 표현하였다. 눈 먼 사랑은 상대방으로부터 닿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아름다움을 느낀다. 도서관에서 스쳐 지나가는 마리의 냄새를 맡고 「눈의 여왕」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마리가 맞냐고 묻지조차 않는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자."
사랑과 햇빛은 둘 다 환하며 멀리에 있다. 눈이 멀어서 햇빛을 본 게 아니다. 햇빛을 보았기에 눈이 먼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사랑한 게 아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눈이 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