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정녕 신첩을 아끼셨사옵니까? 그럼 부디 다음 생에서는 신첩을 보시더라도 모르는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 주시옵소서. 전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미워하는 것도 아니옵니다. 그저 다음 생에는 신첩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것이옵니다."
의빈이 정조에게 남긴 유언은 사뭇 차갑다. 성덕임은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것은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마지막 회까지 "날 사랑해라, 제발 날 사랑해라"라는 정조에게 입을 맞추었지만 그녀의 입술에서는 끝내 연모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의빈은
정조를
사랑했을까?
사랑해도 괜찮지 않아
의빈에 대한 정조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정조는 훌륭한 군주이나 그와 가까워질수록 의빈은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사랑한다면 괜찮다고? 정조는 의빈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언제나 임금으로서의 책임이 먼저였다. 의빈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정조를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나가는 그런 삶이 너무나 소중했다. 주체적인 삶이야말로 그녀의 전부이다.
사랑은 사람을 안 괜찮게 만든다. 상대방이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것이 괴로워진다. 마지막으로 찾는 이가 내가 아니라서 슬퍼진다. 상대방의 지체 높음과 낮음이, 나의 삶을 살기 위해 외면해야 하는 일이,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어진다. 의빈에게 상처를 준다는 걸 알면서도 정조는 왕으로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의빈은 궁궐 구석 궁녀로서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은 누구에게도 결코 괜찮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하께서 그런 분이신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마지막 회 中 의빈 성씨의 말
의빈은 정조의 사랑 안에 갇히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의빈은 정조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랑하면서도 군주로서의 그가 먼저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의빈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이 그런 분이시라는 걸" 의빈은 알고 있었다. 임금이 아닌 자기 자신을 상상해본 적도 없을 만큼 정조는 뼛속부터 조선의 왕이었다. 정조의 마음을 받으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것이라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회에서 의빈은 여러 차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의빈은 모두 알면서도 정조를 사랑했다. 자신의 전부를 대가로 치르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랴.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정조에게 말 한마디 확신을 주지 않은 것은 친구 경희의 말대로 의빈의 허세, 사라지지 않을 의빈의 작은 불씨 때문이다. 그 작은 말 한마디는 원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삶에서 의빈이 스스로 선택하여 끝까지 지켜낸 자신의 정체성이다. 정조가 의빈의 자유를 빼앗고 의빈을 얻은 대가이자, 정조가 사랑하는 그의 여인 의빈이 꿈꾼 소박한 삶, 이제는 스쳐 지나간 그 삶의 남은 끝자락이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큰 인연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다음 생에는 모르는 척, 부디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 달라는 말은 달리 보면 의빈에게 정조가 깊은 인연이었음을 시사한다. 의빈의 유언에 드러난 죽는 날까지 포기하지 못할 자유로운 삶에 대한 그녀의 열망 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이유, 곧 정조에 대한 그녀의 진심 어린 사랑이 숨겨진 유품처럼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