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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Feb 02. 2022

인생의 아이러니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BGM] Joe Hisaishi - Merry-Go-Round of Life (from Howl’s Moving Castle)

https://youtu.be/f7SS57LFPco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김남주 옮김, 민음사(2021), 85면


이 소설의 제목과 같은 문장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청년 시몽이 39세 미혼 여성 폴에게 첫 데이트를 청할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문장을 읽은 폴은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좋아할 만한 집중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그녀는 자아를 잊을 만큼 로제에게 몰두해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프랑수아즈 사강, 앞의 책, 87면






폴은 집에 돌아온 밤이면 혼자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로제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아 외로웠다. 그녀는 자신이 로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절실한 방식으로 로제 또한 그녀를 필요로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로제는 자유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야비하게도, 로제는 자기 자신 때문에 폴이 외롭고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시몽은 폴이 원하기도 전에 폴의 곁에 있었다. 그는 헌신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폴을 사랑했다. 폴이 로제에게서 원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사랑을 주었다. 늙고 외로운 폴은 그런 시몽과 함께 지내며 로제와 한동안 헤어졌지만 결국 폴은 로제에게 돌아온다. 왜 시몽일 수 없었을까? 왜 로제여야만 했나?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 소설 전반에 걸쳐, 문장이나 내용의 측면에서 미묘한 아이러니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가령 첫 장에서 거울 앞에 앉은 폴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프랑수아즈 사강, 앞의 책, 9면


폴은 외로운 걸 끔찍이 싫어하지만 로제는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둔다. 로제는 폴의 곁을 떠나 다른 여자와 있으면서 폴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폴은 로제를 사랑하지만 폴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것은 시몽이다. 폴이 로제를 놓아주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자유를 주었을 때 그는 불행했다. 폴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시몽 대신 로제를 택했다. 폴의 이러한 결정은 앞서 그녀가 두려워하던 다른 사람의 시선이기보다는 "새로 개척하는 대신 갖고 있는 것을 지키려 애쓰는"(프랑수아즈 사강, 앞의 책, 222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시몽여인들의 사랑을 받던 시몽은 그가 사랑한 단 한사람, 폴의 사랑만은 받지 못했다. 소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프랑수아즈 사강, 앞의 책, 237면






소설 안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문장은 늘 물음표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사강은 제목이 물음표(?)가 아닌 점 세 개(…)로 끝나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조심스럽고 유약한 인상의 시몽이 질문하는 뉘앙스를 표현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점 세 개의 보다 중요한 역할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은 네, 아니요,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점 세 개로 끝나는 문장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폴, 로제, 시몽은 각기 원하는 바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마치 답을 기다리듯이 조심스럽게 살핀다. 그러나 그 대답이 어떻든 큰 상관이 없다. 폴은 연거푸 시몽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지만, 폴의 대답과 상관없이 시몽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구애했다. 그는 폴이 원하는대로 자기 삶의 방식을 모두 바꾸기까지 했다. 그래서 폴은 어떻게 했던가? 그녀는 스스로 불행할 것을 알면서도 로제에게 돌아갔다. 폴이 로제의 품에 돌아가자마자 로제는 그녀를 홀로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찾았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간다. 시간이 영원하듯이 삶의 아이러니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사강은 이를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에 있는 점 세 개로 표현한 것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 시몽이 말했다.

- 프랑수아즈 사강, 앞의 책, 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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