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협회에서는 엄선된 작품을 골랐기에 그에 알맞은 칭찬을 기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선정하신 『눈사람 자살 사건』과 제가 읽은 이 책은 전혀 다른 작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해」에서 다올 씨가 프라이팬에 메추리알을 떨어뜨리자, 메추리는 껍질을 깨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바깥으로 날아갑니다. 다올 씨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더라도요. 저는 어느 책이든 의도한 대로만 따라갈 마음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알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날아갈 수 있다면 틈나는 대로 그리할 생각입니다. 나의 세상은 달궈진 프라이팬 위가 아니라 하늘이 보이고 눈이 내리는 환기창 바깥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막내 구덩이가 다락방 구석진 곳에서 먼지 가득 쌓인 앨범을 발견했다. 뭐든 아끼던 옛날식이라 그런지 사진이 잘 보이지도 않게 겹쳐두어 공간을 아껴둔 앨범이었다. 막내는 먼지를 털어내고 앨범을 살펴보다 낡은 결혼사진을 발견했다. 젊은 구덩이와 젊은 흰개미가 뻣뻣하게 웃고 있었다. 막내는 사진을 조심히 들고 엄마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엄마는 이날 엄마가 지금 같을 줄 알았을까?”
“몰랐지, 당연히.”
엄마 구덩이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젊었을 적엔 자신이 어여쁜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착각이었다. 반면 옆에 있는 남편은 기억 그대로 조금 창백하고 왜소하고 카메라 앞에서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다.
흰개미는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열심히는 하는데 항상 어려웠다. 먹은 게 없어 왜소하고 핏기 없이 창백했다. 흰개미는 다른 개미들과 달리 입이 걸지도 않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흰개미는 항상 혼자였던 구덩이 옆에 있었다. 구덩이는 흰개미 옆에 있으면 자신도 흰개미가 된 것만 같았고 외롭지 않았다. 그래서 구덩이는 흰개미와 결혼했다.
흰개미는 결혼하고 나서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흰개미가 일할수록 그의 피부는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개미는 일이 힘들어 입이 걸어지고 힘든 걸 잊기 위해 술에 취했다. 개미가 바빠서 구덩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구덩이는 매일매일 온종일 가게를 열고 상을 차리고 장을 보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욕조를 닦고 환기를 시켰다. 그래도 구덩이는 바쁘지 않았다. 바쁘지 않아서 외로웠다. 어느 날에는 자신을 빼다 박은 네 명의 새끼 구덩이를 보고 속이 상했다. 물려주기 싫은 것만 닮았구나. 밑도 끝도 없이 외로운 걸 어쩜 좋니. 채워지지 않는 맘을 어쩜 좋아.
구덩이는 이 모든 걸 가슴에 묻었다. 혼자 묻으면 새끼들은 다를 것도 같았다. 막내 구덩이가 곱게 차려입고 연지 곤지 바른 얼굴이 사진과 겹친 탓에 눈물이 났다. 막내는 이날 막내가 지금 같을 줄 알았을까?
소년은 어느 소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소녀가 자라면서 주름이 지고 주근깨가 돋고 말이 많아지는 게 안타까웠던 소년은 소녀에게 찾아가 말했다. “나는 네가 좋아. 그런데 네가 예뻐서 좋아. 네가 계속 예쁘다면 나는 너를 계속 좋아할 텐데.” 소녀는 소년과 생각이 달랐다. “나는 네가 싫어.” 소년은 답했다. “상관없어.” 소년은 소녀의 배를 갈라 소녀가 나이 들도록 하는 쓸데없는 것들을 모두 빼낸 뒤에 푹신한 인조 솜털을 잔뜩 집어넣었다. 소녀에게 가장 예쁜 옷을 입히고 가장 예쁜 장신구로 장식하고서 꽥꽥대는 입술을 실로 예쁘게 꿰매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소년은 자신이 좋아하는 화장에 자신이 좋아하는 입술에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은 조용해진 소녀를 갖고 놀다 장식장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다. 그런 다음 소년은 다른 소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달아실(2020), 14면
죽는다는 말을 사라진다고 하는 마음은 얼마나 애틋한가요. 「눈사람 자살 사건」 외에 「인생 연습」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들은 제게 죽은 게 아니라 사라진 것이기에 저도 언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남겨진 이들 생각에 벌써 눈물이 나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개가 제 욕을 했다더라는 소식을 듣는대도 제가 신경이나 쓸까요? 저는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금세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 아무개가 따뜻한 물에서 녹고 싶다는 눈사람을 쓴 이라면 다릅니다.
「고수」에 나오는 검객을 보다 보면 꼭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검객은 자신의 발로 고수를 찾아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 예의 바르게 칼을 쥐여주었습니다. 검객은 그 칼을 휘두른 고수에 의해 단칼에 죽어버립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 손으로 이 책을 고르고 제 마음으로 이 글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로써 단칼에 목이 베이듯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인생 연습」에는 어느 남자가 연습한 인생이 조목조목 그려집니다. 「개미」에는 개미의 힘겹고 고독한 노동이, 「황금털 사자」에는 늠름하고 기백 있는 수사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글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어느 남자가 인생을 연습할 동안, 수컷 개미가 허리 가늘어지도록 일하는 동안, 수사자가 당당하고 느긋할 동안 그들 옆의 여성은 무엇을 했나요? 「인생 연습」에서 아내는 남자가 인생 연습을 하다 보니 어쩌다 생겨났습니다. 「개미」에서 구덩이는 늘 투덜거리며 만족을 몰랐습니다. 「황금털 사자」에서 암고양이는 수사자에게 교태를 부리고 무모한 짓을 하다 쫓겨났습니다. 「암탉은 말한다」에 나오는 암탉은 쥐새끼에게 하필이면 가슴을 내어주고는 내장까지 파 먹히며 황홀해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마치 역할 놀이에 쓰이는 인형 같아서 역할만 있을 뿐 그들의 삶도 목소리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성이기에 이 글이 너무나 마음 아픕니다. 아픈 마음에 그들에게도 자기만의 것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구덩이가 왜 투덜거렸는지, 구덩이가 왜 만족을 못 했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구덩이는 밑이 빠져서 만족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썩어 없어지는 먹이로는 구멍을 메울 수 없어서 그런 겁니다. 구덩이는 살기 위해 개미가 벌어오는 먹이가 필요했지만, 개미가 없었다면 그다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심판」에 등장하는 눈사람은 어린이가 바로 창조주이자 유일신이라고 주장한 일 때문에 신성 모독죄로 화형에 처합니다. 눈사람은 제자도 믿는 이도 없어서 그가 사라지고 나면 세상에는 그를 기념할만한 어떤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 눈사람은 눈으로 재림하여 내릴 것입니다. 눈이 내리는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을 보면 비로소 사람들은 알게 되겠지요. 그들의 아이들이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고, 어린이가 창조주라는 눈사람의 증언이 맞았고, 그런 말을 했던 눈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러고는 어른이 되면서 다시 잊어버릴 겁니다. 유년 시절은 눈이 내리던 잠시뿐이며 우리는 사는 동안 한순간도 어린이가 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어른이 되기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갈등도 싫고 논쟁도 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증언을 하려면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비틀대며 봄을 향해 걷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에게는 진실이 곧 불편한 신성 모독인 탓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에 녹아 사라지고, 진실은 언젠가 눈이 되어 온 세상을 하얗게 덮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아픈 것은 아프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부터는 아프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겠어요?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분명히 나의 외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의 증언은 눈에 호소하는 까닭에 봄이 오면 쉬이 녹아 사라질 테지만, 다시 겨울이 찾아오는 그날엔 비로소 나를 알아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