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앙드레 지드, <좁은 문>

by 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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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들어가는 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은 크리스찬적 윤리를 따르려는 이들에게 상징적인 문구다. 세상적으로 살기란 어렵지 않다. 약간의 양심의 가책과,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면서, 적당히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며, 그렇게 살아 가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그러한 욕구를 극복하고 건실하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특히, 어떤 종교에서는 신도들이 극단적일 정도로 금욕적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의 연애에서도 종종 그런 사례가 발생한다. 애인이 엄청난 종교적 믿음의 소유자라는 고민이 가끔 라디오 사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종교 때문에 인간적인 욕구를 거스르는 일이 가능할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어 내 몸을 내던지고 싶은데, 종교가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고 해도?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제롬과 알리사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알리사는 성녀이자, 철학자이자, 금욕주의자이다. 반면, 제롬은 섬세하고 인간적인, 우리와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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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제롬은 방학을 맞아 어머니와 함께 외사촌의 집에 얼마간 머물게 된다. 외숙모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줄리에뜨는 활발한 편이고 알리사는 조용한 편이었다. 어느 날, 제롬은 외숙모가 집 안에서 젊은 남자와 희롱하며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불륜의 현장에는 줄리에뜨도 외숙모 곁에 있었다. 안타까운 기분으로 제롬은 몰래 알리사의 방으로 숨어 들어가 그녀가 괜찮은지 살펴본다. 알리사는 고개를 파묻고 어머니의 죄로 인해 눈물 흘리며 고통받고 있었다. 그 순간, 제롬은 알리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슬픔을 느끼며 그녀를 평생 사랑하고 지켜주겠노라 결심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알리사는 기독교적 믿음이 나날이 깊어져 간다. 제롬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알리사는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이유로 들어 거절한다.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결혼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하지만 지상적 사랑에 매진하는 대신 신에게 봉사하는 삶을 택했던 것이다.


제롬은 알리사를 잊고자 3년을 먼 곳에서 지내보지만, 결국 다시 외숙모의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제롬을 알리사는 이전보다 차분해진 모습으로 맞이한다. 그녀는 이미 모든 지상적 욕구를 초월한 듯한 모습이었다. 제롬은 그녀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대하는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알리사는 자신이 저녁 만찬 때 자수정 목걸이를 걸고 나오지 않으면 그만 돌아가 달라는 뜻으로 알아 달라고 제롬에게 말한다. 결국 식사 시간에 그녀의 목에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았고, 제롬은 불행이 가득한 채로 외숙모의 집을 떠나버린다.


이후, 알리사를 잊지 못하여 고통받던 제롬은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알리사의 몸이 나날이 쇠약해지다가 요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다. 제롬은 나중에 찾은 그녀의 일기장에서 자신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마음을 확인한다. "...나는 지금보다 그를 더 사랑했던 적이 없다. 하오나 주여, 저로부터 그를 구하기 위해 제가 없어져야 한다면, 그렇게 하소서..." 알리사는 마지막까지 숭고한 종교적 삶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결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알리사를 그리워하며 제롬은 비탄에 잠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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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알리사를 보는 평가는 엇갈렸다고 한다. 과도한 신비주의적 종교관이 낳은 병폐인가? 아니면 숭고하고 희생적인 아름다움인가? 작가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작품은 다분히 자전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어린시절의 경험과 <좁은 문>의 제롬의 생활은 여러 면에서 맞닿아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여성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것, 어머니의 강압적인 종교적 영향력 아래 살아간 것, 외사촌 누이를 사랑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한 것, 그 누이가 가정에서 불행한 상처를 겪었던 것 등이 공통적이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좁은 문>을 작가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괴롭힌 종교적 억압을 고발하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는 잘못된 종교의 해석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 서 있는 평가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을 감상한 대부분의 독자가 느끼는 것은 알리사가 부정적 결말을 맞기는 하지만 무한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인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독단적이고 경직된 믿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순수함과 영웅적인 면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의 실패는 어떻게 뚜렷하고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 있는 지 보여준다.


이 책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나의 주변 사람이었다. 고귀한 정신을 지키며 청순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타인의 불행을 재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마찬가지처럼 보일 수 있다. 나는 과연 나의 생각이 진리라 믿고, 편협한 생각에 가로막혀 나와 주변 사람의 불행을 자초하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이 나에게는 진리라고 생각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를수록, 사고의 폭도 좁아질 것이고, 그럴 수록 계속해서 사람과 타인에 대한 열린 시각과 관대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나 완전한 인간적 자유를 선언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에 앞서 <배덕자>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난 과도한 개인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함으로서, <좁은 문>과 양극에 서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두 작품은 서로 대립되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극단적인 자유주의도 경계했지만, 광신적 믿음과 금욕주의 역시 문제라고 보고, 이들을 중재하는 합일점을 찾아 절제와 해방의 조화가 이뤄지는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아무리 견고하고 구체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선택 앞에서 한 번쯤 고민해본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을 수록, 그에 벗어나는 선택을 내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사소한 선택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쾌락의 수단이 많고 도덕적 기준이 불명확한 때에는 종교적 금욕주의를 삶의 원칙으로 택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종교 대신 다른 부분이라면 어떨까? 개인적 선호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사랑에 몰두해 있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신이 아닌, 좋아하는 인물이나 사상의 가치관이 부지불식간에 나의 종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흠, 나는 나 자신의 종교에 골몰하여 그에 벗어나는 다른 모든 선택지들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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