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

피터 스완슨, <죽여 마땅한 사람들>

by LEAN

얼마 전 아는 언니가 남자친구에게 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친구가 언니에게 '분노조절장애' 아니냐며 헤어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요즘엔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참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소한 일에 '버럭!'하는 사람들한테도 이 말이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분노조절장애는 '분노를 참거나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과도한 분노의 표현으로 정신적, 신체적, 물리적 측면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피해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 참는 사람이 더 많을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후자 쪽이 월등히 많아 보인다. 회사에서 비일비재하게 무시당하는 일들이나 운전하다가 듣는 욕설들에 일일이 대응하지 못하여 뒤끝으로 남기고는 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 책은 남에게 사악한 짓을 하고도 멀쩡히 지내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여성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다. 그녀는 자신의 살인을 '사회에 대한 기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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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소설을 이끌고 나가는 릴리는 깡마르고, 새하얗고, 고고한 분위기를 뽐내는 미인이다. 그녀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숲에서 책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생활을 한다.


그녀가 어릴 적, 그녀의 부모는 자유분방한 유명 예술가 겸 작가였다. 부모가 호화로운 파티를 열 때마다 릴리는 진절머리를 내고는 했다.


13살 때, 릴리는 자기 집 다락에 얹혀 사는 중년의 뚱보 화가가 자신을 이상한 눈초리로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화가는 릴리가 자는 방에 들어와 몰래 자위를 하기도 했다. 끔찍해진 릴리는 언제고 결국 그 화가는 자기를 강간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깊은 숲 속 우물로 화가를 유인하여 몰래 빠뜨려 죽였다.


고등학생이 된 릴리는 부잣집 자제 에릭과 잠자리를 갖게 되었다. 에릭은 상류층의 '잘 나가는' 학생이었는데, 릴리에게는 주말에만 데이트를 하자고 말했다. 대학생이 된 릴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에릭은 주중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한 릴리는 에릭의 견과류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그를 죽여버린다.


릴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에릭이 바람 피운 여자인 미란다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결심이 확고해진 이유는 그 여자의 행보를 들었을 때였다. 미란다는 돈 많은 사업가와 결혼한 뒤 또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불륜 상대를 시켜 남편을 살해하여 전 재산을 차지하고자 했다.릴리는 미란다가 '죽여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살인의 정당성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 릴리는 미란다의 불륜 상대를 자기 편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결국 미란다는 자신의 불륜 상대에게 머리를 맞아 죽게 된다. 그리고 그 불륜 상대 역시 릴리의 손에 목이 졸려 죽는다. 나중에 사건 현장에 다다른 경찰은 릴리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브레드가 미란다를 살해하고 도망쳤다고 여긴다. 릴리는 홀로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은 언제나처럼 세상에 일조했으며, 곧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것이라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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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억울한 경험을 한 둘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남자친구가 바람을 핀다거나, 성희롱을 당한다거나 하는 것도 그러한 부류다. 그런데 소설의 여주인공은 그러한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제공자를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응징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남자친구가 양다리를 걸쳤다고 치밀한 살인을 계획하는 사람은 없다. 여주인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이다. 독자들은 그녀가 냉정하게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경악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 릴리는 미워하기에는 꽤나 매혹적인 캐릭터이다. 열세 살에 첫 살인을 할 때부터 그녀는 긴장하거나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발빠르게 처신한다. 혹시나 경찰이 들이닥쳐도 순발력 있게 계산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그녀는 여리여리한 겉모습과 달리 강인하고 냉철한 내면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과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은 '죽여 마땅한' 지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수천 번은 더 위해를 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억울한 일들을 많이 겪은 사람이라면 릴리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줬는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미란다는 릴리가 본인을 증오했다는걸 몰랐다. 기억도 안 나는 사실 때문에 살인의 대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우리는 자신이 희생양이 되면 그 일을 끝까지 기억하지만, 포식자가 되면 그 일을 쉽게 잊어버린다. 자기 이익을 위해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도 사이코패스 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이 결여되어 있다.


비인간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도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이들을 만나면 선량한 사람들은 상처 받으면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고 피해버린다. 대체 이러한 분노유발자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작가는 희생당한 사람들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 릴리라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그녀를 내세워 독자들에게 가상의 도피처를 열어주었다. 독자들은 극단적인 결말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상처받은 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지도 모른다.


* 작품은 곧 영화화되며, 주연(릴리)은 엠버 허드가 맡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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