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건물, 빨간 대문에서 시작된 나의 작은 꿈
수업을 위해 주말마다 짐을 챙겨 카페로 이동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은 행복했지만, 타인의 공간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작게 느껴지게 했다. 나의 온전한 공간이 필요했다.
틈날 때마다 공간을 찾아다녔다. 무작정 공간을 계약하기엔 자본도 경험도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주말에만 잠시 빌려 쓸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찾기로 했다. 내 한정된 시간과 자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우연히 온라인 카페 <문화상점>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핸드메이드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들,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정보를 나누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쉐어할 공방을 찾았고, 마침 집과 가까운 디저트 공방이 눈에 띄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은 내 수업이 시작될 그림이 그려지는 곳이었다.
공간 쉐어 후 주말에 원데이 수업을 열었지만 사람이 바로 모이지 않았다. 수업을 알리기 위해 블로그, 인스타그램, 카페에 꾸준히 글을 올리며 외쳐야만 했다.
“여기서 수업해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수업은 주로 1:1 또는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처음 만들어보는 사람도 “내가 이걸 만들었다고?”라며 만족하고 가져갈 수 있도록, 간단하지만 디자인이 돋보이는 작업물을 준비했다. 귀걸이, 반지, 키링, 그리고 화려한 디자인의 손거울 같은 소품들이었다.대부분의 수강생은 여성분들이었고, 직접 만든 작품을 손에 들고 가는 그들의 미소를 보며 나도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초보 강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사람이었다. 레진 공예를 가르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그만큼 나만의 차별성이 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자유도’였다. 모든 수강생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가는 수업이 아니라, 주어진 재료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디자인할 수 있도록 수업을 구성했다.
“이 수업엔 정답이 없어요. 원하는 대로 만들어보세요.”
처음엔 낯설어하던 수강생들도 점차 자신의 감각을 찾아 나갔다.
작은 꽃을 넣어 만든 반지, 글리터를 가득 담아 반짝이는 귀걸이,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낸 키링...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각기 다른 빛을 뿜었다. 그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만의 상상력이 만든 결과였다. 다양한 작업물들이 수강생들의 손끝에서 탄생했고, 나는 그 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렇게 자유로운 수업 방식 덕분에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졌고, 나의 블로그와 SNS에는 다양한 작품 사진들이 쌓여갔다. 포트폴리오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나요?”라는 새로운 문의가 이어졌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내 수업은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함께하는 그 순간이 단순히 ‘수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힐링의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 혼자서도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나눴다.
신기하게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결이 통했다. 재료를 고르는 손길, 디자인을 고민하는 눈빛, 완성된 작품을 보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열정을 나누며 작은 대화를 이어갔고, 그 시간만큼은 정말 즐거웠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내 안에 뜨거운 열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열정은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이걸로 뭔가를 이뤄내고 싶지 않아? 더 크게, 더 멀리 나아가 보자."
온라인 판매도 꾸준히 늘었고, 수업 문의도 점점 많아졌다. 한동안은 회사와 수업, 온라인 판매를 병행했지만,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이쯤이면 회사를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혼자 서기 위해 나만의 공간을 찾아 나섰다. 첫 시작인 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무권리, 저렴한 월세, 그리고 부담 없는 조건들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공간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은 월세가 터무니없이 저렴한 공간을 발견하고 마음이 설렜다. 퇴근 후 바로 보러 가겠다며 서둘렀지만, 그사이 이미 다른 사람이 계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탈했다. 처음 찾는 공간이기에 더 신중하고 싶었지만, 막상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나지 않으니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몇 달을 검색하고 기다리기만 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확신이 자리 잡았다.
“내 공간은 반드시 찾아질 거야. 준비가 되면, 그때 나에게로 올 거야.”
어느 날, 후임이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여기 어때요?”
파란색 2층짜리 건물과 빨간 대문이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였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여기다.’
집과도 가까운 거리, 저렴한 월세. 하지만 문제는 권리금이었다. 2,500만 원. 생각하지 못한 큰 금액이 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카페를 운영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끌렸다.
점심을 건너뛰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파란색 건물과 빨간 대문이 화면 속 그대로 내 눈앞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와 낡은 나무문 틈새로 오래된 카페의 흔적이 풍겨왔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작은 먼지가 날렸다. 낡고 허름했지만 그곳에 선 순간, 이미 내 머릿속은 그곳에 서 있는 나로 가득했다.
‘수업 책상은 저쪽에, 여기는 카페 손님들을 맞아야지.’
‘이 벽은 깔끔하게 페인트칠을 새로 해야겠어.’
나도 모르게 그 공간과 동화되었다.
회사로 돌아왔지만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선은 모니터를 향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공간이었다.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송금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냥 질러보자.’
송금 완료. 화면에 계약금 입금 확인 메시지가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어.’
그제야 남편과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계약금을 입금했다고?”
남편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걱정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의 결심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잘했어. 즐겁게 하면 되지.”
그 말에 나를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 사라졌다.
2,500만 원.
입금을 하고 나니 그 금액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잠시 나를 덮쳤다.
‘만약 망하면 어떡하지? 이게 잘못된 결정이면?’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파란 건물과 빨간 대문. 누군가는 낡은 건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곳은 꿈의 출발점이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언젠가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을 기억하게 되기를. 그렇게 나는, 그 문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