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투두둑... 투둑...'
보르도에 처음 온 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다. 망할 놈의 비. 처음 그날과 마찬가지로 한쪽 벽에는 캐리어 두 개와 여행용 더플백, 그리고 바이올린이 놓여 있었다. 어디에 언제까지 머물지 몰라 쉽게 짐을 풀지 못했던 때와 다르게 하나라도 빠뜨린 건 없는지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가져갈 짐은 전부 싸두었다. 캠핑카 때 마시다 남은 증류주들과 선물 받은 와인까지 전부 싸 들고 한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엘리에게 두고 갈 테니 천천히 마시라는 메모를 남겼다. 여전히 몸이 안 좋은 조니에게는 죽을 사다 주곤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내일 아침에 어차피 엘리네 집 열쇠를 맡겨야 해서 얼굴은 보겠지만. 낮에는 제레미를 만나고 왔다. 마침 보르도 들를 일이 있다고 하여 아시안 음식 좋아하는 제레미를 위해 쉐프의 콘서트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다. 호주로 떠날 준비를 조금 일찍 하게 되었다며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얼마 전에 영영 못 볼 것처럼 인사를 하고서 다시 보니 또 볼 것 같았는지 ‘잘 가, 다음에 봐.’라는 간단한 인사만을 나누곤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본 뒤 캐리어 지퍼를 닫고 침대에 앉으니 모모가 다리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다.
“모모야, 나 이제 갈 거야.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엘리 언니랑 잘 지내고. 오래오래 살아.”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은 건지 더 깊게 파고들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낸다. 불을 끄고 모모에게 팔배개해주곤 누웠지만,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행복했던 프랑스 생활이 거짓말처럼 모든 게 끝났고 내일 일어나 정신 차리고 보면 본가에 있을 것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여전히 프랑스에 남고 싶은 마음도, 얼른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도 공존했다. 머릿속엔 그동안 1년간 겪었던 일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단순히 2년간 주말에 배운 프랑스어를 한두 마디 써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여름휴가 일주일로는 별로 말도 못 섞어보고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다. 오래 쓸 돈은 없었기에 돈도 벌고 싶었다. 기왕 버는 돈, 와인 양조를 배우며 벌고 싶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 나이 서른이라는 것을.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갈 수 있는 나이가 서른이었다. 더 늦지 않게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회사에 퇴사 소식을 알리고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다. 처음엔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2년 동안 학원을 다녔지만, 주말만 다니느라 그런지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프랑스어 전화만 오면 머리가 하얘졌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도 반 이상은 못 알아들었다. 프랑스어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사람 만나는 걸 꺼리게 되었고 매사에 소극적으로 대하게 됐다. 집을 구하려 했더니 부동산 제도는 이미 프랑스에 살고 있던 이들이 새로 집을 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부동산 중개 사무실로는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서류를 6개나 준비해야 했지만 내게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꼴로까씨옹이라도 구하려 해봤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산다는 부담감과 게다가 기간이라던가 지역이라던가 조건 맞는 곳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청년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을 위한 곳이었다. 은행 계좌라도 먼저 만들어볼까 은행을 갔더니 집과 직장이 없으면 계좌를 만들 수 없었다. 일자리라도 잡아보려 했더니 역시나 주소와 계좌를 요구했다. 그리고 폐쇄적인 와이너리들은 이미 팀이 전부 만들어진 상태라며 보르도부터 샴페인, 부르고뉴, 알자스, 쥐라 등 여러 생산지의 650개 와이너리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답변 온 곳은 스무 곳도 채 안 되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채용을 못 하니 건승을 빈다는 메일이었다. 한국에서 취업을 준비할 때 느꼈던 좌절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돈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고 집 없는 상황이 더 길어진다면 거리에 나앉거나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에 실패한 채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존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져 갔고 그 와중에 열리는 와인 행사들에 혹시나 기회가 있을까 하고 없는 돈을 쪼개가며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녔다. 다른 도시에서 마주친 구걸하는 노숙자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프랑스어라도 유창하게 하지’라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차라리 여권이 사라져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오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두 달 동안 아무 진전이 없자 식당 주방 자리라도 알아볼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와이너리에서 일하러 온 처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바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프랑스에 그저 1년 동안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양조 경험을 쌓으며 프랑스어 실력을 늘리려고 왔으니 말이다. 좌절에 좌절을 거듭해가는 석 달 동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밤마다 숨죽여 흐느껴 우는 소리만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중 희망이라는 빛 한줄기가 하늘을 꽉 채운 먹구름을 뚫고 내려왔다. 샴페인 와이너리에 면접을 보고 라베고스에서도 연락이 와 면접을 봤다. 내려온 빛 한줄기가 이내 먹구름을 밀어내듯 일이 하나둘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에서 진원 누나가 소개해 준 현신 님의 연락으로 보르도에서 살 곳을 구했다. 그리곤 연락이 없던 라베고스에 한 번 더 찾아가 마르졸렌 사장과 면접을 보고 결국 포도밭과 양조 업무를 12월까지 하는 계약을 따내게 되었다. 프랑스 생활에서 처음으로 얻은 성취였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어 어느 정도 안정은 되었지만 편한 삶이 이어지진 않았다. 출퇴근으로 하루 5시간씩 귀중한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고 있었다. 매일이 스트레스였고 출퇴근 때문에 그만둘까 생각도 수십번씩 할 정도였다. 그리고 육체노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매일같이 허벅지와 허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세조니에들처럼 도망칠 수 없었다. 어떻게 얻어낸 자리였는가. 이를 악물고 양조 시즌까지 무조건 버텨내야 했다. 세조니에와 부팀장 산드린의 경멸에 찬 시선을 매일 버텨야 했고 이곳에서도 프랑스어 소통은 언제나 문제였다. 스믹을 받아 생활하며 550유로라는 큰돈을 월세로 내다보니 매일같이 돈을 아껴야 했기에 주말에 어디 여행은 꿈도 못 꿨다. 평일에 퇴근한 저녁에, 주말 내내 계속해서 기사를 써서 와인21닷컴에 한 달에 3~4개 기사를 계속 보냈다. 돈 문제로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분명 지난번에 샀을 때 정말 맛이 없던 파스타 면이었는데 0.2유로 차이로 가장 저렴했다. 그 차이 같지도 않은 차이 때문에 10분 동안 고민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눈이 뒤집혀 비싼 품목으로만 장바구니를 채웠고 계산대에서 예산을 한참 초과한 것을 보고선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점심값은 언제나 5유로가 넘지 않게 했고 더 아껴야 할 때는 2~3유로로만 먹을 수 있는 식단을 선택했다. 아침으로는 1유로짜리 바게트 빵을 사흘에 걸쳐 나눠 먹었고 저녁으로는 일찍 자야 했기에 위에 부담되지 않게 매일 시리얼을 먹었다.
악착같이 버틴 덕분이었을까, 시간이 흘러가며 점차 상황은 좋아졌다. 가장 친한 친구 제레미를 만나 오지랖 덕분에 한 달 이상은 편히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할 수 있었다. 파비앙과의 협상 성공으로 격주로 금요일은 기사를 쓸 수 있게 재택근무를 하게 되어 한결 편해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애몬이었지만 바득바득 우긴 덕분에 마르키 달렘 인스타그램 계정 하나를 관리할 수 있었다. 아주 지루한 포도밭 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포도 재배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줬다. 기사 취재와 예정에 없던 여름휴가 덕분에 마고 지역의 그랑 크뤼 클라쎄 와이너리를 딱 한 곳을 제외하고 전부 방문할 수 있었다. 여름이 지났고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 받듯, 한국에서부터 그렇게도 간절히 원해왔던 양조 업무를 배정받았다. 포도밭과 달리 하루하루 빠르게 변하는 와인의 상황 덕분에 많은 걸 눈으로 보고 직접 해보며 빠르게 체득해갔다. 동료들이 전부 선하고 친절했기에 마음이 편했고 매일같이 프랑스어로 부딪히니 언어 또한 빠르게 늘어갔다. 한 달 정도 와이너리에 감금되어 매일 초과근무에 주말까지 근무하다 보니 월급을 두 배 넘게 받게 되고 파비앙의 노력으로 와이너리 숙소에서 지내며 월세를 아낄 수 있었다. 평소처럼 이 악물고 아낀 덕분에 이렇게 모은 돈으로 연말에 2주간 캠핑카로 프랑스 전국의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완벽한 결말이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프랑스 1년의 워킹 홀리데이의 마지막 밤이었다. 유난히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 고마웠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눈앞에 그려졌다. 포도가 양분을 빨아들여 열매를 맺듯 내게는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양분이 되었던 게 아닐까. 덕분에 포도밭과 양조 경험도 하고 프랑스어도 늘고 돈도 벌고 여행까지 충분히 한, 일석사조의 가성비 넘치는 워킹 홀리데이를 보낼 수 있었다. 프랑스에 더 남을 수 없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지만, 지금은 꾸준히 달려온 만큼 안정적인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뒤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옆에 함께 누워 갸르릉 거리는 모모를 보며 이제는 자야 한다며 스스로 최면을 걸어 스르르 잠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나의 가장 어두웠던 첫 3개월 동안 내게 위로가 되었고 들을 때마다 울게 만들었던 블랙 퍼레이드 노래가 재생되고 있었다.
제대로 안 할 거면 집어치워, 넌 결코 날 막지 못할 거야
왜냐면 이 세상은 내 심장을 앗아갈 수 없으니
한 번 해봐, 넌 날 무너뜨리지 못해
우리는 모든 걸 원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거야
난 변명이나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거야
난 부끄럽지 않아, 난 내 상처를 보여줄 거야
모든 상처받은 이들에게 용기를 줘
들어봐, 이게 진정한 우리니까
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해, 난 영웅이 아니야
그저 평범한 소년이야, 이 노래를 불러야만 했던
그저 평범한 사람이야, 난 영웅이 아니야
난 신경 안 써
우린 멈추지 않을 거야, 우린 계속해 나갈 거야
- Welcome To The Black Parade: My Chemical Romance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