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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제주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L_V9vfeAXgQ


일은 자정이 넘어 끝났다. 일이 많다기보다 내일 일을 미리 해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회사에는 당분간 저녁에 일할 예정이라고 일러두었다. 박봉에 불안정한 프리랜서지만 이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시간에 일하기. 세면도구, 비상약, 옷 몇 벌, 화장품, 책도 두 권이나 챙겼다. 얼추 마무리가 된 가방을 보는데 뭔가 싸하다. 여행을 앞두고 짐을 쌀 때면 뭔가 빠뜨린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대한민국 땅인데 카드랑 신분증만 있으면 되지 싶어 면허증을 찾는데 없다. 집을 다 뒤져도 없다. 대체 어디 간 거야! 렌트는 물 건너갔다. 뚜벅이 생활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겠지. 미련두지 않고 주민등록증을 챙겼다. 혹시 몰라 여권도 챙겼다. 주민증에 있는 사진은 내가 보아도 나 같지 않았다. 십 년쯤 전 풀메이크업을 하고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으로 면허증을 재발급받으러 갔다가 실물과 다르다며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두 어 시간 쪽잠을 자고 첫차를 타러 나왔다. 김포공항까지는 지하철이 가장 빨랐다. 나 말고 캐리어를 끌고 있는 일행이 몇 보였다. 이윽고 열차가 다가오고 문이 열리자 헉 소리가 났다. 첫차가 아니었던가. 열차 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밀리는 캐리어를 힘주어 부여잡았다.


역시 대한민국. 이게 바로 코리아지.




눈을 떴을 때 제주 상공에 진입했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하얀 구름이 보였고 그 아래로 낮게 깔린 땅과 불규칙하게 구획된 푸른 밭이 보였다. 2월의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빛깔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혼자 여행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20대 때는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그때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이 인생의 큰 자산이라 여겼다. 그러지 않으면 청춘에 대한 배신이라 믿었고 마치 여행이 의무인양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떠났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20대도 아니고, 그때처럼 혼자 여행을 다녔다간 사연 많은 여자로 보이기 십상일 것이다.

나는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메마른 줄 알았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공항에서 나와 가장 먼저 롱패딩의 지퍼를 채웠다. 말로만 듣던 제주 바람은 거셌다. 코트를 입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지퍼를 올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키가 큰 야자수가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대상이 있는 듯 없는 듯 낮게 읊조렸다.

안녕,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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