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생각해보면 꽤 오랜 기간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무얼 보아도 감흥이 없고, 인생이 재미없고, 주변의 상황은 화만 돋우고, 뭐 하나 되는 것은 없고. 외롭고, 외롭고, 외롭고.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희망찬 미래를 타진해 보기엔 그럴 의지나 의욕이 내겐 없었다. 지루하게 나열된 일상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지만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그런 하루하루가 앞으로도 계속 놓여있었다.
#2
모친의 장례를 치른 m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라고 물으니 안 괜찮은 거 같애, 흐흐 하며 웃었다. m은 웃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상황에서 웃었다. 어색할 때, 할 말이 없을 때, 부끄러울 때 웃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 제주라고 했다. 주변에 제주에 간다는 얘기가 들려 끼워달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여기 엄청 좋아. 너도 꼭 와봐.
제주는 대학교 때 동아리 멤버들과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거의 잊힌 채 스냅샷처럼 몇 가지 장면만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3
늦은 밤, b는 식당 앞에서 핸들을 틀었다. 일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밥 먹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먹고 가자 하니 지금 가야 한다고 했다. b는 늘 이런 식이었다. 갑작스럽게 연락해 오고는 급하게 돌아갔다. 그와 나는 몇 번이고 끝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치 색종이를 가위로 오린 다음 풀을 발라 덕지덕지 붙여 놓은 상태. 너저분하고 볼품없어 언제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나는 팔짱을 끼고 검은 창 밖을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제주가 떠올랐다.
나, 제주에나 다녀올까?
갑자기?
그냥,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똑같은데 뭐.
그래라.
상관없다는 무신경한 말투가 거슬렸다. 어쩌면 나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일 수 있었다.
#4
병원에서는 정밀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응급 상황 시 혀 아래에다 물고 있으라며 비상약을 처방해 주었다.엄마는 고가의 보석이라도 되는 양 비상약을 가방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챙겼다.노령연금을 받게 되었다고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엄마의 몸 여기저기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야말로 폭삭 주저앉았다. 복용하는 약의 개수가 넘쳐 그날그날 증상이 심한 걸로 골라 먹었다. 다리가 저려 잘 걷지 못하고 이제는 다리 근육이 다 빠져버렸다. 얼마 전에는 심장이 안 움직인다고 했다.심전도 검사는 한 달 뒤로 잡혔다. 한 달이라... 병원 예약을 기다리다 비상상황이 생길 판이었다. 병원은 항상 지루하고 대기가 길었다. 그리고 내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그날 저녁 제주행 비행기를 끊었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 편도로 끊었다. 재미없으면 돌아오지 뭐. 그래도 숙소는 정해야지 싶어 영상을 몇 개 보고는 한 군데 날짜가 맞는 곳으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