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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무밭도 예쁘더라

by b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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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hyeRSFKUQp4


숙소는 구좌읍에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량도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낮은 돌담길을 따라가니 아담한 집 한 채가 나왔다. 보기만 해도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지낼 계획이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자 린넨 소재의 품이 넓은 옷을 입은 여주인이 나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목 인사를 건넸다. 체크인 시간이 아닌데 짐을 맡겨도 되느냐고 물으니 여주인은 말없이 숙소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다 두시면 되세요.
혹시 근처에 어디 갈 데 있나요?
카페요?
어디든요.
글쎄요.


여주인은 예의 조용한 미소를 짓고는 나가버렸다. 갈 데가 없다는 것인지 나의 질문이 구체적이지 않아 마땅한 대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인지 갸우뚱했다. 짐을 내려놓고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주변 맛집과 볼거리를 찾아보니 정말 근처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대생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기요, 혹시 근처에 어디 갈 만한 데 있나요?


손에 칫솔을 들고 있던 여대생은 갑작스러운 나의 질문에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가 좀 외져서 버스 타고 나가야 해요.
그런 것 같더라고요. 혹시 오늘은 어디 가세요?
네? 아직 모르겠어요.


여대생은 멋쩍게 웃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제야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적당히 만나는 사람들에 의지해 그들의 지식과 경험에 무임승차하려 했던 심보가 부끄러워졌다. 아무 계획이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닌 속박이 되었다. 이제 뭐 하지? 이 질문은 앞으로 여행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유유자적 느긋하게 지내려던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머리와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에 갈 장소와 그곳에 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내게 망망대해는 호기심이 아닌 막막함의 대상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밥집을 하나 고르고 숙소 밖으로 나오니 여주인이 예의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 갈지 정하셨어요?
밥부터 먹으려고요.


여주인이 또다시 목 인사를 하며 조용히 웃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는데 거뭇한 피부와 옷차림, 느긋한 말투 이곳과 참 잘 어울렸다. 이런 곳에서 지내면 나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나도 덩달아 웃음 지으며 목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나왔다. 곧 버스가 올 예정이었다. 이 차를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이야~


버스에서 내리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야트막한 검은 돌담 너머로 비슷한 간격을 두고 허연 무들이 초록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시골풍경에 꽤 익숙했다. 어지간한 장면이 아니면 잘 감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제주는 달랐다. 밭에 난 무조차도 예뻤다. 식당으로 이동하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평소 사진을 찍기보다 눈에 담아두는 편이었는데 남는 건 사진이라 하지 않나.


도로 끝에는 투명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멀리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흰 포말을 만들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제주는 아름다운 장면을 선사했다. 80년대 지어졌을 법한 양옥과 공들여 설계된 듯한 깔끔하고 세련된 카페와 음식점들도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래서 제주, 제주 하는구나.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하고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직 다음에 갈 장소를 정하지 못했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도 검색에 열중했다. 여행을 온 건지 일을 하는 건지. 시간에 쫓겨 해치우듯 일을 처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예민하고 날카로웠고 여유가 없었다. 숙소의 여주인처럼 되려면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지 몰랐다. 깨진 액정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비자림.

비자림... 비자림이라 어디서 들어봤지? 무슨 책이 있지 않았나? 비자나무숲... 아!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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