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이 되자 까마귀 같은 검은 후리스를 입은 가이드가 나타났다. 가이드는 좌우를 살피더니 대뜸 물었다.
혼자세요? 네. 혼자서 여길 어떻게 오셨어요? 버스요. 여기 오는 버스가 있어요?
좀 걸어야 하는데 앞에 정류장이 있어요, 비자림 정류장.
쓰리 콤보로 질문을 날린 가이드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혼자 여행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제주에는 언제까지 있어요? 숙소는 어디에 있어요?
가이드는 혼자 다니는 내가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나를 보는 시선과 질문에서 어렵지 않게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못 본 체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 다양한 제약이 생기는데 여행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나이 든 여자가 그것도 혼자 여행을 하면 분명 어떤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말 못 할 사연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이쪽으로 와보세요.
가이드는 나무의 잎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비자나무 잎이 아닐 비(非)처럼 생겼죠. 그래서 비자나무란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어요. 여기 보시면... 열매가 있죠? 이게 비자라고 하는데 이걸로 암수 구분을 해요. 줄기를 따라 열매가 길게 늘어서 있으면 수나무고요, 암나무는 열매가 이렇게 모여 있어요. 비자는 독하다고 해서 약재나 구충제로 사용했고요, 왕에게 진상품으로도 바쳤어요.
가방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가이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 적어요? 설명이요.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노트는 나이가 들어 생긴 습관이었다. 언제부턴가 두뇌를 스쳐 사라지는 정보가 아까웠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지는 온갖 것들이 아쉬웠다. 이면지, 종이봉투, 포스트잇, 영수증... 덕분에 집 안은 맥락 없는 메모 쪼가리들로 넘쳐났고, 집 청소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하게 과거의 기록과 만나곤 했다. 운이 좋으면 살아남아 방 어딘가에 다시 처박혔고 태반은 열람되지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오늘의 메모는 얼마나 가게 될까.머릿속에 딱 박히면 좋으련만. 누군가의 머릿속에 딱 남지 못한 건 노트뿐이 아니었다.
가이드와 나는 나란히 서서 걸었다. 마실 나온 듯 천천히 걸으며 제주에 대해, 나무에 대해, 그 밖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멀리서 본다면 함께 비자림에 온 일행처럼 보였을 것이다. 가이드의 억양에 타지의 사투리가 섞여 있어 물어보니 이 년쯤 전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어쩌다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빙긋 웃으며 제주가 좋아서요,라고 했다. 그냥 ‘좋아서’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좋아서’ 이면에 복잡한 서사와 번잡한 심리가 뒤엉켜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A코스까지 동행한 가이드는 B코스에 더 크고 오래된 비자나무가 많으니 꼭 가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덕분에 자신도 오랜만에 힐링이 되었다고 구태의연하지만 듣기 좋은 말을 해주었다.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이었다. 덕분에 제주 여행의 시작이 좋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곶자왈*의 의미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기 바란다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혼자 다니면 사진 많이 못 찍을 거 아니야.
어느새 그녀는 말을 놓고 있었다.
B코스는 바닥에 울퉁불퉁 돌이 있어 걷기가 불편했다.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평소 일이 없으면 집 밖에 좀처럼 나가지 않는데 첫날부터 무리를 하고 있다. 조금 걷다가 돌아갈 요량이었지만 비자림의 마스코트인 새천년 비자나무를 보려면 가던 길을 끝가지 가야 했다.
구불구불 울창한 숲길이 이어졌다. 햇빛이 잎에 부딪혀 여기저기 버짐처럼 흩어졌다. 산책로 양옆으로 500년에서 800년 된 오래된 나무들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 이름 없는 풀들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끝에 새천년 비자나무가 있었다.
너는 영겁의 시간을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그때 왜 권여선의 소설이 떠올랐을까. 소설은 연인을 잃은 여자와 형을 잃은 동생과 아들을 잃은 엄마가 비자림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왜 끝내 가보지 못했다는 것인지 나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었다. 작가는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받고 소설을 썼을지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 영감의 한 톨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