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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Jul 27. 2024

당근 하세요?

중독입니다


당근~


젊은 여자 성우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나눔 받을 수 있나요?     


네,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상태를 예약 중으로 변경했다. 회사 다닐 때부터 10년 넘게 쓴 상이었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더 이상 바닥에 앉지 않게 되어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기능상의 문제는 없지만 연식이 있다 보니 여기저기 까지고 해져 나눔으로 올려두었었다. 누가 가져갈까 싶었는데 채팅이 온 것이다. 상대는 오늘 저녁 퇴근하는 길에 들르겠다고 했다.      


당근 앱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부터였다. 늘어난 집의 크기만큼 새로 세간을 장만해야 했으며 나는 대부분의 물건을 중고로 구매했다. 침대, 소파, 책상과 책장 같은 가구 외에도 운동할 때 필요한 1.5kg 아령과 요가매트, 작업할 때 집중을 도와줄 향초와 캔들워머,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한 간이용 의자와 접이식 테이블, 집 안의 감성을 더해줄 꽃무늬 휴지 케이스, 어지럽게 얽힌 선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화이트 앤 우드 케이블 수납함 등등등. 이사를 전후로 당근 거래를 활발하게 한 결과, 36.5도에서 시작한 매너 온도는 한 달 만에 51.7도가 되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전까지 당근 앱으로 중고물품을 구매해 본 일이 없었다. 풀옵션 원룸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집 안에 무언가를 들일 공간 자체가 없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굳이 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만의 왕국을 세운 뒤로 이야기는 달라졌다. 같은 물건이라도 좀 더 예쁘고 유니크한 디자인을 선호했고 그런 것들은 중고거래임에도 가격이 제법 나갔다. 가격제안하기 기능도 몰라서 판매자가 올린 가격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그것이 소위 쿨거래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당근 거래를 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여태껏 물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욕망이 거세된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한동안은 거의 중독이나 다름없었다. 틈만 나면 접속했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관심목록에 추가하고,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중고 물품이 모두 내 것인 양 정신 못 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싸고 좋은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속도가 생명이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멀쩡한 물건을 내다 버렸다.      


이미 쓰고 있는 게 있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이사를 가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서.      


소비의 시대에 사람들은 소비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풀거나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일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한 심리를 자극하며 기업은 매일 같이 새로운 상품을 찍어냈다. 지구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상품이 나와 있고 이것들은 결국 쓰레기가 되어 소각되거나 매장되거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지구에 버려지는 쓰레기를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자기합리화 속에 나의 당근 생활도 이어졌다. 그거 몇 푼이나 하는데 구질구질하게 그러지 말라고 엄마가 핀잔을 줬지만 나에게는 지구를 위한다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     


세간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나니 이제는 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처박아 두고 쓰지 않았던 것-포장도 뜯지 않은 족자스크린, 휴대용 미니 스팀다리미, 꼬리뼈 방석, 일자목 교정을 위한 기능성 베개, 구식 디자인의 오래된 캐리어 같은 것들을 올리면서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효용 가치를 상실한, 다시 말해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들을 누군가에게 처분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눔 혹은 푼돈에 올리면 신기하게 채팅이 왔다. 그러면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 도시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지.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화려한 도시에서 나와 같이 중고로 살림을 채우는 이들을 떠올렸다. 욕망의 도시에서 욕망을 거세당한 채 중고물품으로 살아가는 우리 당근족을.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지구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는 그들에게 모종의 동질감과 인류애를 느낀다.     


오늘 저녁에는 10년 넘게 나와 함께한 상을 건네며 상대에게 따스하게 미소 지어야겠다. 상대가 혹여 나의 헌 물건을 가져가며 어떤 패배감, 수치심 같은 것을 느끼지 않도록. 지구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지지를 보내며 잘 쓰시라고 인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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