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힐을 신었다. 삼성역에 가기 위해. 일 년에 한두 번 예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러 회사가 있는 삼성역에 간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또래 동료들은 이제 부장이 되고 차장이 되었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같은 직급이 되었을 것이다. 지나온 나의 인생 여정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굴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미로 속을 헤매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랄까.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특히나 삼성역은 올 때마다 길을 잃는다. 반짝이고 화려한 상점들을 보고 있으면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간다. 홀린 듯 여기저기를 기웃대다 보면 어김없이 미로 속에 빠져 있다. 공항을 연상케 하는 티끌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을 걷고 있으면 비현실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여기가 대한민국이 맞나.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며 살짝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에 다닐 때도 신지 않았던 힐을 신고 나온 이유다. 이곳에 있는 것이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한 마디로 추레해 보이지 않기 위해.
한 중식당에서 우리는 만났다. 해가 바뀌고 첫 만남이었다. 다들 조금 더 늙은 것을 빼고 비슷해 보였다. 20대에 만나 이제 모두 40대가 되었다. 우리 중 둘은 어머니가 되었고 나를 포함해 나머지 둘은 귀염둥이 조카가 생겼다. 오랜만에 이들을 만나면 잠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때 우린 젊었고, 불안했지만 창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언젠가 좋은 상대를 만나 안정되고 윤택한 삶을 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나를 제외한 셋은 아직 그 루트 속에 있었다. 탄탄대로는 아닐지라도 어디까지 몇 km가 남았는지 이정표가 있어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도로 말이다.
검은색 깔끔한 유니폼에 핀 마이크를 착용한 직원이 중앙 쪽 자리로 안내했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고르는 동안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가격을 확인했다. 한 입도 안 되는 만두 세 개에 7500원이라니...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 내비치진 않는다. 이곳에 있는 것이 어색해 보이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오늘은 돈 쓰러 나온 거니까. 우리는 하가우와 창펀, 차슈바오. 완탕과 청경채볶음, 가지딤섬을 시켰다. 평소 먹을 리 없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었다.
조막만 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사는 이야기를 했고, 옛날에 함께 놀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각자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또래인 우리들은 부모님의 연배도 비슷했고, 이제 다들 어디가 아프셨다. 그리고 대화는 어김없이 회사 이야기로 흘렀다. 아는 이름이 나오면 껴들기도 했지만 해를 거듭해 가며 이제는 모르는 이름이 더 많았다. 그러면 나는 어색해 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소외되지 않은 척 연기하며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회사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진 지금 예전처럼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사는 세계가 달라졌고 서 있는 길이 달랐다. 그런 것쯤은 안다. 그러니 못 어울리는 티를 내면 안 된다. 한동안 회사 이야기가 이어지다 o가 말했다.
"미안, 회사 얘기를 너무 많이 했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저는 뭐 똑같아요. 이사는 잘하셨어요?"
o는 2년마다 이사를 다니다가 최근 드디어 자가 마련에 성공했다.
"어. 언제 다 같이 놀러 와라. 애들은 남편한테 봐달라고 하면 돼. 참, h도 이사해."
"왜? 집 좋던데."
말하면서 나는 2년 전 방문했던 h의 오피스텔을 떠올렸다. 11평이라고 했지만 공간이 잘 빠졌는지 상당히 넓어 보였다. h가 말했다.
"아, 거기 좁아서 아파트로 가려고요. 수원 쪽으로."
진짜 좁은 집을 모르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방이었다. 방에 잠시 머물다 집에 갈 줄 알았는데 방과 방을 거쳐 여전히 방에 살고 있었다. h는 은행 빚으로 가는 거라며 집값이 뛰면 서울로 다시 올 거라고 했다. o가 내게 물었다.
"너는? 아직 거기 사는 거야?"
"저도 이사해요."
"어디로?"
"근처인데 저 임대아파트 됐어요. 그리고 예술인 주택도요."
"오, 잘 됐다. 거기 월세 좀 저렴하고 그런 데 아니야? 되기 쉽지 않다던데."
"막차에 됐어요. 매번 떨어졌는데 40대가 되니까 가산점이 붙어서 이런 것도 되네요. 하하."
"잘 됐다. 거기서 얼마나 살 수 있어?"
"임대아파트는 10년이고요, 예술인 주택은 최장 20년이요."
"우와, 진짜 잘 됐다."
"한 시름 놓았죠. 이제 창작을 해야 하는데. 하하."
나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공중에서 부서졌다. 내 웃음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데 왜 주눅이 드는 것 같지. 왜 자꾸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거지.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조금 더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들은 내일 출근을 하려면 빨리 귀가해야 했고, 나는 내일 일정이 딱히 없었지만, 오랜만에 신은 힐 때문에 발이 피곤해 얼른 들어가 쉬고 싶었다. 집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였다.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얼굴을 한 직장인들과 나란히 서서 오는 동안 생각했다. 실용성이란 1도 없이 예쁘기만 한 힐을 신고 나온 것에 대해. 하루 종일 내 발은 잔뜩 구겨진 채 숨도 못 쉬고 있었다. 내일이면 양 발 뒤꿈치에 물집이 잡힐 것이다. 나답지 않았다. 이질감과 위화감을 덮기 위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나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나는 더 떳떳했어야 했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해.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갈 길에 대해.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이제 집에 간다. 내 곳이 아닌 것만 같은 곳에서 나의 곳으로. 나의 방으로.
도어락 문을 열었다. 힐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에 누웠다. 손바닥 만 한 나의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편안하고 아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