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는 오후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는 무뚝뚝한 딸을 대신해 간간이 전화를 했다.
"요즘 뭐 해?"
"번역해."
"일이 들어와?"
"안 들어와."
"그럼?"
"동네에 원서 파는 서점이 있더라고. 희곡 하나 샀어. 그거 번역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반응이지만 그때마다 뜨끔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해명하듯 말했다.
"영어 공부 할 겸 겸사겸사. (사이) 이해 안 되지?"
"어."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엄마가 말했다.
"알바라도 해야지."
"알바할 시간 없어. 유튜브*도 해야 하고. 그리고 나이 많아서 이제 알바로도 안 써줘."
"돈을 벌어야지. 네가 언제까지 젊을 줄 아냐."
엄마와의 통화는 항상 같은 패턴으로 이어졌다. 안부를 묻고, 걱정 어린 충고가 이어지다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이번에도 엄마는 답답한 기색을 내비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 역시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래서 내가 전화를 안 하는 거야.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했다. 40대 초반에 무직에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곤 했다.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번역한다고 답하지만 잘 나가는 번역사는 아니기에 어떤 날은 하루 한 시간도 일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이 며칠씩 계속되면 스스로 일을 찾아야 한다. 집 청소를 하거나 케이크를 굽거나 음악을 틀고 스트레칭을 한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하루가 금방 갔다.
최근에는 희곡을 번역하고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서점을 발견했는데 마침 그곳은 원서만을 취급하는 독립서점이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4평 남짓 되는 공간을 한참을 둘러보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책방 주인에게 물었다.
"좀 쉬운 책 없나요? 짧고 대화 위주로 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방 주인은 대화가 많은 건 이것뿐이라며 한 희곡을 골라주었다. 2019년에 출간된 한 젊은 영국 작가가 쓴 사랑에 관한 얇은 희곡이었다.
그날부터 번역이 시작되었다. 어떤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있었고, 요즘 외국 작가는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했고, 오랜만에 영어 공부도 좀 할 겸 말 그대로 겸사겸사 시작했지만, 사실은 시간을 때울 무언가를 찾았던 것 같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는 답답한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으니까. 세상으로부터 뒤처져 있다는 불안감을 잠시라도 떨칠 수 있으니까.
번역은 보통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 이루어졌고 일이 있는 날에는 저녁 느지막이 책상에 앉아 잠들기 전까지 이어졌다. 어젯밤에도 번역을 하다 두 시가 넘어 잠들었다. 모르는 단어와 숙어가 어찌나 많은지... 명색이 번역가인데 부끄러울 정도였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이나 표현들은 여러 번 반복해 읽다 보면 뒤늦게 감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는 부분은 색칠을 해두거나 공백으로 두거나 혹은 원문을 통째로 옮겨두고 넘어간다. 이 속도라면 주말쯤 초벌 번역이 끝날 테고 이후에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가며 표시해 둔 부분을 수정할 것이다. 그렇게 수차례 퇴고의 과정을 거치면 번역이 끝이 난다. 한 달 정도 걸리려나? 일단 계획은 그러하지만, 그 와중에 문득문득 드는 생각은 멈출 수 없다.
이걸 왜 하고 있지, 돈도 안 되는데.
모든 행위가 돈으로 연결되어야 가치를 창출한다고 여기는 천박한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따라 언제까지 젊을 줄 아냐는 엄마의 경고가 뒷골을 서늘하게 한다. 조금 다른 삶을 살기로 선택했지만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놈의 돈이 뭐기에.
떨칠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올 때면 새로운 일을 찾아 벌인다. 시간을 보낼 무언가를 찾아, 영감을 얻을 무언가를 찾아. 번역이 끝나면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각색해 볼까. 아니면 아예 대본을 써볼까. 별일이 없어도 새로운 일을 찾는 이유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답답함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별일 없는 오늘도 일을 찾아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