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학교 앞에서 자취할 때는 아침 일찍 나와 새벽에 들어갔다.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느낄 때였다. 일본어 학원 새벽반에 다녔고 공강 시간이 되거나 수업이 끝나면 학보사 기자실에 가 기사를 썼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 주로 선후배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좋은 기사란 무엇인가 고민했던 것 같다. 요즘 대학생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랬다. 직장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 먹듯 야근이 있었고 주말에도 간간히 출근했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그 습관은 이어져 밖으로 나돌았다. 각종 모임에 나갔고 작업을 할 때면 노트북을 들고 정독도서관엘 갔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눈을 붙이고 그다음 날 눈 뜨면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나는 주로 원룸 전세로 생활했다. 잠만 자는 방에 큰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이도 시원찮은데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를 버텨내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방세를 아끼려 반지하 같은 1층에서도 살아봤는데 그 방은 경매에 넘어갔고 하마터면 전세금을 날릴 뻔했다. 그즈음부터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가 생겼다. 그때가 삼십대 중반을 넘어가던 시점이니 나는 참 많이 늦는 편이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강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공공장소는 문을 닫았고 커피숍에 가느라 드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집의 크기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려면 일정 크기 이상의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는 원룸에서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돈이 얼마가 들든 대출을 받아 작은 평수의 아파트나 오피스텔로 이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뉴스에 자주 나오는 노도강에 가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임대아파트도 신청했다. 매번 떨어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경쟁률이 낮은 곳에 나름 전략을 세워 지원했다. 예술인 주택도 지원했다. 공동체 주택을 선호하지 않지만 이것저것 가릴 입장이 아니었다.
먼저 결과가 나온 것은 임대아파트였다. 예비 순번이었는데 막차에 턱걸이로 당첨이 되었다. 당첨을 알리는 등기와 함께 계약금 고지서가 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0이 하나 안 붙은 줄 알고 몇 번을 세어봤는지 모른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보고 대한민국이 그래도 복지가 잘 되어 있구나 싶으면서도 나라가 돌봐야 하는 대상이 나라는 사실에 묘하게 현타가 왔다.
내가 그 정도로 가난했다니.
당첨 소식은 의외로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가난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것만 같았고 나의 가치를 정부가 공식적으로 낙인찍은 것 같아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임대아파트에 대한 편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 역시 사회적 시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깨달음은 또 다른 각도에서 나를 복잡하게 했다.
결국 나는 예술인주택을 계약했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기엔 아직 젊고 나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게 맞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예술인주택은 임대아파트의 월세보다 5배 비쌌지만 시세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가격이었다. 임대아파트가 세워진 지 30년 된 구축인데 반해 예술인주택은 신축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곳에 나만의 왕국을 세웠다.
10평 남짓한 아담한 공간이지만 작업하고 휴식하기에 좋은 아늑한 환경으로 꾸몄다. 취향을 한껏 반영해 남부끄럽지 않은 공간으로, 가난을 떠올리지 않을 공간으로 만들었다. 나의 존엄을 북돋을 공간으로 말이다.
이곳에 얼마나 있게 될까.
설마, 최장 20년을 다 채우지는 않겠지.
사실 나는 가난보다 내 생애 어떠한 작품도 만들어 내지 못할까봐 그것이 더 두렵다. 이곳에 얼마나 있든, 이후에 임대아파트로 가든, 복권에 당첨되어 자가에 살든 계속해서 쓸 수 있기를, 끊임없이 창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가난은 죄가 아니다. 부에 상관없이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아야 하며 누구나 자신의 존엄을 지킬 자기만의 왕국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