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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12. 2024

밤 산책


별일 없는 하루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초록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옥상화단에 올라가 물을 주고 청소기를 돌리고 운동을 하고 당근 거래를 했다. 지난주 동네 언니가 1인용의자를 주었고 내가 쓰던 사무용의자를 3만원에 올렸었다. 허리를 잡아주는 17만원짜리 고가의 의자였는데 성격 탓인지 허리를 등받이에 기대지 않아 제 기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새 의자는 팔걸이가 나무로 된 암체어였는데 새 의자 쪽이 집안 분위기에 더 잘 어울렸고 쿠션감도 나쁘지 않아 기존 의자를 처분하기로 한 것이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는 차도 없이 운동복 차림으로 와 집까지 의자를 굴려갔다. 에누리를 해달라고 해서 2만 5천원에 가져가라고 했다.


오후에는 일을 했다. 일이 그래도 좀 많은 시즌이 있는데 요즘이 그러했다. 오후 내내 새 의자에 앉아 일을 했고, 끝나갈 무렵 b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뭐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다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말에 즉흥적으로 만날래? 하고 물었고 우이천에서 만나 좀 걷다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세수도 안 한 채 머리를 질끈 묶고 레깅스 차림으로 나갔다. 완연한 가을이어서 밤공기가 시원했고 얼굴에 달라붙는 날파리도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모기도 없었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산뜻한 바람을 느끼며 b와 걸었다. 둘리보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너도 어른이 된 거란다, 라는 명언이 적힌 벽화를 보며 둘리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했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던 입이 크고 뼈만 있는 물고기 그림 앞에서 “난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 하며 흉내를 내자 내내 듣고 있던 b가 너랑 같네, 하고 말하곤 혼자 피식 웃었다. 그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걸으며 b와 간간히 팔짱을 꼈고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했다.


돌아올 때는 따릉이를 타고 천변을 달렸다. 내가 앞장섰고 b가 뒤따랐다. 청량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따릉이를 반납할 때 내가 자전거 지지대를 세우지 못하고 있자 b가 조용히 와 대신해줬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오전에 의자 팔았으니까 내가 고기를 살게.”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고깃집에서 목살 2인분에 소주 1병을 주문했고 술이 약한 나는 한 잔을 마시고 얼굴이 불콰해졌다.


“한 잔 더 따라줘 봐.”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왜 그러지?”

“오늘 기분 좋아서 취할라고 그런다.”


나는 양념을 헹군 김치와 고추절임을 구워 와사비를 올려먹었고, b는 깻잎절임에 쌈을 싸서 먹었다. 그러다 쌈의 크기를 잘못 가늠했는지 쌈이 b의 입에서 튕겨져 나와 접시로 떨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입이 작은 b는 평소에도 입주위에 뭘 자주 묻히고 먹었다. 나는 올여름 b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그가 양념게장을 볼까지 묻히고 먹었던 기억을 상기시켜 주며 크게 웃었고 b도 작게 따라 웃었다.


“내가 이렇게 웃는 건 유일하게 당신을 만날 때야. 누군가에게 웃음을 준다는 것 자체로 당신은 존재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거야. 한 인간이 태어난 이유를 다하고 있는 거지.”


내가 히죽거리며 말하자 b는 무심하게 됐다, 하고는 쌈을 도로 입에 넣었다. 나는 b가 실은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한번 b를 놀렸다.


“지금 내가 한 말 멋지지 않았어? 존재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는 말?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 있었어?”

“됐다.”


b는 또다시 일축하고는 소주를 들이켰다. 나는 b가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고깃집을 나와서는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와 갈지자로 걸었다. 내가 비틀거리자 b가 내 팔을 잡아 주었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며 b에게 말했다.


“예전엔 행복이 뭔지 몰랐는데, 이런 게 행복인 거 같아.”


곧 버스가 오고 나는 버스 안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b에게 손을 흔들었고 b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메시지가 왔다.


나도 즐거웠다.


아까는 됐다고 하더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더할 나위 없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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