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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05. 2024

만원짜리 양심


평일 오후,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oooo입니다.”


oooo은 십 년째 후원 중인 한 시민단체였다. 수화기 너머의 여성은 친근하고 사교적인 말투로 덕분에 꾸준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며 거듭 감사함을 표현했다. 나는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끽해야 매달 만오천원을 낼 뿐이었다. 1년이면 18만원이고, 10년이면 180만원이지만, 어디서 선생님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저희가 최근에 활동이 많아지다 보니까 지난달부터 적자가 되었거든요, 혹시 가능하시면 이번 달 한 달만 기존에 내시던 금액만큼 증액이 가능하실까요?”


한 끼 외식 값에 불과했지만 나 역시 적자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조카들 추석 선물로 메이커 운동화는 사줄 수 있어도 후원금에 추가로 넣을 돈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려울 것 같아요.”

“요즘 경제가 너무 어렵죠. 알겠습니다. 저희 열심히 할 테니까요, 앞으로도 저희 활동에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나는 겸연쩍게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기분이 찜찜했다. 오죽했으면 전화를 했을까 싶으면서도 흔쾌히 그럴게요, 하고 답하지 못한 제 자신이 못마땅했다. 만오천원이면 커피 몇 잔만 참으면 되었고 아직 통장에 여유자금도 남아있건만 선뜻 그러겠다고 하지 못한 것은 만원짜리 양심 때문이었다.


십 년 전 퇴사를 하며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대로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때 시작한 것이 채식과 후원이었다. 채식은 페스코로 지내다가 2년여 만에 그만두었고, 후원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를 벌든 매달 수익의 1%는 사회에 환원하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는데 후원을 시작하고 금액을 정정하지 않았으니 1%를 넘길 때도 넘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일을 하지 않았던 몇 년 동안에도 계좌이체를 중단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비율은 의미가 없었다. 오롯이 행위만이 남은 것이다.


후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준에는 보잘것없는 나의 환경이 누군가로부터 빚져온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해왔다. 경제적‧물질적 여건만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일상과 구애받지 않는 사고, 낮고 아픈 것들에 공감하는 능력,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취향,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삶 같은 일견 나의 온전한 선택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주변의 상황과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듯,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에 의해 무수히 영향을 주고받으며 빚어진 나라는 한 세계 역시 혼자서는 결코 세울 수 없고, 지금도 끊임없이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통해 유지 보수해 나가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주변의 환경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러져간 수없는 삶에 더 감사해야 했다. (본래 감사함을 모르고 태어난 지라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각은 하고 있다!)


문제는 의지였다. 눈 뜨면 보이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시스템, 불공정한 행태에 눈 감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앞서 나가 무언가 할 정도의 의지는 없었다. 나는 나의 목소리를 대신해 소리 높여주는 그들과 같이 될 수는 없었다. 나의 양심이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뒤에 숨는 소극적인 방식을 택했다. 어쩌면 후원은 사회에 대한 모종의 부채감을 내려놓기 위해 선택한 알리바이일지 모르겠다.


후원은 총 세 곳에 하고 있는데 각각 만원 내외의 소액이지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엔 충분했다. 그래도 뭔가 하고 있으니 괜찮다는 자기 위안과 위선적인 시혜의식을 채우데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계속 마음에 걸렸고 스스로를 만원짜리 양심이라고 불렀다. 단돈 만원이면 채울 수 있는 서푼짜리 양심. 나는 이것이 불순하지만 가능한 많이 권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요즘 같이 개인의 자유가 빈번하게 침해되는 시기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념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꺼이 제 생애를 던진 그들에게 감사하다. 만원짜리 양심이지만,


늘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후원과 사회참여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한 글은 여러 방향을 선회하다 여기로 왔다. 여러 문장들이 떠올랐고, 노쇠한 몸에 쇠약한 말투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목청을 높였던 한 정치인이 생각났다. 요즘 기부해야 할 데가 너무 많다고 하소연했던 지인의 말도 떠올랐다. 국민총생산이 사상 최대치를 달성하고 있는데 기부가 필요한 곳이 많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회의 아픈 고리에 마음이 가는 것이야 말로 양심일 것이다. 그 양심이 무뎌져 사그라지지 않도록 지키려는 노력 또한 시민의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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