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가 끝났음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아, 맞다. 섬유유연제. 헹굼 때 넣는다는 걸 깜빡하고 일에 집중한 까닭이었다. 올 한 해 그렇게 일이 없더니 어쩐 일인지 일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그간의 적자를 메울 절호의 기회였다. 덕분에 며칠 째 집안에만 머물고 있다. 운동과 산책은 멈추었고 한동안 잠잠했던 오른쪽 고관절과 꼬리뼈 통증이 도졌다. 일할 때를 제외하고 앉아있지 않기 위해 요즘은 밥도 싱크대에서 서서 먹고 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휴식하는 삶이란 대한민국에서 불가능한 건가.
그것이 배부른 생각이었음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뒤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는 부장님이 된 입사 동기였다.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녀를 부장님이라 불렀다. 부장님은 이사님이 몇 개월간 나의 작업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정산 방식을 바꾸는 걸 제안했다고 전했다. 참고로 이 업계에서는 볼륨(워드) 정산 방식과 시간 정산 방식이 있다. 볼륨 정산은 말 그대로 단어 수를 기준으로 한다. 예컨대 I am a girl 이라는 문장이 있으면 4 워드가 되고 여기에 워드당 단가를 곱한 만큼 급여가 지급된다. 단가는 번역사의 실력이나 경력에 따라 정해지는데 몇 십원 정도이다. 문제는 작업의 난이도나 작업 파일의 특수성으로 인해 볼륨 대비 시간이 많이 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는 시간 방식으로 정산된다. 마찬가지로 소요된 시간에 시간당 단가를 곱하는 것이다. 실제 소요 시간만큼 정산받는 후자 쪽이 더 합리적이지만 대개 회사는 워드 정산으로 계약한다. 번역사가 실 소요 시간 이상을 보고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워드 정산 쪽이 회사로서는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 방식으로 정산받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사실 이 얘기가 나왔거든.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워낙 특수한 작업이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방어했는데, 이번에 또 얘기가 나온 거야. 그래서 나도 같은 논리로 방어하기 어려운 입장이야. 일단 한 2주 정도 워드 정산으로 바꿔보고 정 안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어때? 그럼 나도 위에 설득할 명분이 생길 것 같아.”
부장님은 그 제안이 그럴싸한 타협안인 것처럼 말했다. 워드 정산으로 바꾸면 월급이 낮아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그것은 구태여 2주를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부장님에게 내가 올해 월 백만원도 안 되는 금액을 벌었고, 4년째 같은 시급을 받고 있으며, 벼룩의 간을 빼먹지 여기서뭐 더 줄일 게 있느냐는 말을... 집어삼켰다. 내가 난처해하고 있자 부장님은 자신도 중간에서 골치가 아프다며 생각해 보고 알려 달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고, 몇 십억 매출을 올리는 회사가 고작 몇 만원을 줄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야단인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사정할 땐 언제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회사의 이기적인 태도에 넌덜머리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혹여 일감이 줄거나 아예 없어질 수도 있었다. 일이 끊기면 뭐 먹고살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앞이 깜깜했다. 이 바닥에는 불량식품이라도 먹으려는 프리랜서가 많았고,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조금 다른 삶을 살기로 선택했어도, 나만의 길을 추구하기로 결심했어도 나는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현실 속에 놓여 있었다.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왔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인지 성북천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코 안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가 뒤통수까지 나아갔다. 코끝이 찡했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그동안 너무 별일 없는 일상에 안주했었나.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젖어 어떤 도전도 변화도 추구하지 않게 된 건 아닌가. 현실을 외면한 채 집 안에 기거함으로써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하고 있지는 않았나. 걷는 동안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삶은 내던져짐의 연속이고 그때마다 다시 나아가는 것 또한 인간의 숙명이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고 돌파구가 필요했다. 근데, 뭘로?
그날 밤 볼륨 정산은 어렵다고 회신했다. 단, 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을 모색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굶어 죽기야 하겠어. 침대에 누었다. 당연히 잠이 오지 않았고, 당근으로 알바를 검색했으며, 시급 18,000원짜리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알바를 보았다. 이 참에 영어 공부나 해볼까. 아니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볼까. 수제초콜릿 만드는 것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생각은 다시 꼬리를 물고 나아갔다. 그래,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중요한 건 쩨쩨하지 않은 담대함이지.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좋은 글감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변화는 두렵지만 그리 무서워할 일도 아니었다.
도리스 메르틴의 자기계발서 아비투스*에서는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에 대해 설명한다. 그중 하나가 심리자본인데 이는 인생에서 어려운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능력이다. 심리 자본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긋는 고정 마인드가 아닌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믿는 성장 마인드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스트레스를 견디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자는 심리 자본이 많은 사람일수록 낙관적 태도를 보이며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금방 회복하는 탄력성을 갖는다고 했다.심리 자본이야말로 생존을 위협하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무기인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브루디외가 정의한 개념.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는데, 이를 아비투스라 했다. 그는 구별짓기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을 결정짓는 세 가지 자본-경제/사회/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도리스 메르틴은 여기서 더 나아가 7가지 자본-심리/문화/지식/경제/신체/언어/사회-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