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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Jun 08. 2021

난로불 앞에 앉아 있는 잊지 못할 뒷모습을 그리며

- <일곱해의 마지막>을 읽고

  첫 눈이 소복이 쌓여 창문 너머 하얀 세상이 완성되었을 때 이 책을 완독했다. 참으로 알맞은 순간에 책을 덮었다고 생각했다. 백석의 시가 주로 겨울이 배경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가 버텨낸 일곱 해들이 온통 서리가 잔뜩 낀 겨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계절과 참 잘 어울렸다.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그는 나와 가까워졌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인 백석(기행)이 북한에서 살면서 당의 이념과 시 창작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한 일곱 해를 담은 소설이다. 일곱 해가 지난 뒤 그는 1996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절필했다.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시는 그의 동시 <기린>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의 첫 시를 마주함에 있어 독자들이 반가움을 표하자마자 그 반가움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뀐다. 왜 하필 ‘기린’이 나오느냐는 당 위원인 엄종석의 날이 선 물음에 기행은 ‘무엇을 물어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을 한다. 이윽고 엄종석이 그를 비웃으며 하는 말에 독자도, 기행도 말문이 막힌다.      

  ‘우리나라의 곰이나 범을 두고 왜 머나먼 아프리카의 기린을 끌고 와 붉은 깃발을 다느냔 말이오?’      

  책을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력감이 가로 막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에는 무엇을 대답해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나도, 기행도 알고 있다. 그리고 기행은 엄종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래야만 했다.     


  상허의 자백위원회에서 기행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종군작가가 되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온 상허의 소설은 미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당은 그를 반동 작가로 낙인찍는 아이러니를 범한다. 자백위원회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백을 받고 싶어 했다. 질문을 반복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상허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상허의 말은 휴지조각처럼 잘려나갔고 결국 그는 소진하였다. 소진하여 말을 잇지 못한 대가로 그는 간첩이라는 오명을 쓰고 집필권을 박탈당했다. 상허는 벌이 죄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십여 년 전에 문인들과 구인회를 만든 일이 월북 뒤에는 벌을 받음으로서 죄가 되었다. 기행도 그 사실을 알기에 반동 작가라고 낙인 받은 상허와 술잔을 기울일 수 없어 차가운 눈을 맞으며 선 채로 안부를 나눈다. 김연수 작가가 실소를 지으며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은, 허허, 시인에겐 죽으라는 말이죠.” 집필권을 박탈당한 상허와 쓰지 않을 자유가 없는 기행은 이미 죽은 사람과 다름없었다.      

  상허의 일은 결국 기행에게도 벌어졌다. 상허와 접촉하였고 당이 원하는 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파견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집필권 박탈이라는 벌이 내려졌다. 기행에게 시는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쓰는 일, 즉 사랑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지 않으면 사과가 열매를 맺었다고 쓰면 된다는 병도의 말은 겉보기엔 쉬웠으나 시인 백석의 두 손을 스스로 자르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며 포기할 수 없는 일인 시작(詩昨)은 그렇게 기행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협동조합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서희는 그로 하여금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된 세상에서 마주친 서희는 사람이 북적이는 역에서 큰소리로 백석의 시를 읊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그 순간 기행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언어를 마주하게 되고, 그 언어를 쓰던 시절의 그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독자를 보며 뿌듯함을 느껴야 함이 정상이거늘, 백석 시인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황급히 도망치면서 말한다. ‘아니요.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기행은 자아가 두 동강이 난 채로 시인 백석과 현실의 기행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고, 그 괴리감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비로소 명확히 인식하게 만든다. 그가 처한 현실을, 현실이 앗아간 그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에게 시인 백석은 이제 떠나간 옛 연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되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이상 속 존재. ‘응앙응앙 우는 당나귀’의 메아리만 들릴 뿐이다.     

  불합리한 세상에게 울분을 토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전부인 시를 버린다. 시인 백석으로 살면서 남겨온 시들을 끄집어 써내려가고, 쓴 것들을 불에 태우는 행동을 반복하며 그는 이제 시와 자신의 불행은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 ‘늙은 어머니’도,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도 없는 쓸쓸한 공간에서 난로불 앞에 우두커니 앉아 시인 백석으로서 삶을 태우는 기행의 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렸다. 그의 표정은 어땠을까. 슬픈 표정이었을까, 허탈한 표정이었을까. 나는 비로소 그가 무표정을 짓길 바란다. 상허의 무표정을 보고 반가워했었던 것처럼.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그 순간만큼은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도 결국 찬양시를 썼다. <나루터>는 그의 첫 찬양시였다. 그리고 <나루터>는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시인 백석을 사랑하기 위한 이유는 충분했다. <나루터>라는 시 하나가 그의 외롭고 애처로운 일곱 해를 모두 요약하고 있었다. <나루터>는 여타 다른 찬양시들처럼 노골적이지도 않으며, ‘다시’라는 말이 한 문장에 중복 등장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음이 보인다. 이 시를 끝으로 그는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다. 순수하고 연약한 언어들을 사랑했던 그에게는 개성도 문체도 필요 없는 찬양시를 쓰는 것보다 죽을 날까지 시와 작별함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짐작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참으로 어려운 소설이었다. 소설에 몰입하는 것쯤이야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의 삶, 그것도 시인의 삶을 이해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폐된 시인이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고자 몇 번이고 반복하여 문장들을 곱씹었고 상상했다. 이 책은 그래야만 하는 책이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을 또다시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은 년도에 태어난 내가 그의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은 이제 이 책과 마주 앉은 독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단순히 끄적이는 것조차 두려운 현실이라 불에 태우기 위한 시를 쓰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가 그때에는 없었더라도, <일곱 해의 마지막>을 통해 백석을 사랑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임을 생각하니 작품의 존재에 감사했다.     


  나는 이제 내 마음 속 한 편에 기행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누리는 이 자유가 그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가질 수 없는 간절한 것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내가 <일곱 해의 마지막>이 어렵게 느껴졌던 것도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자유, 또 어떤 것은 쓰지 않을 자유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인의 삶은 병도와 비슷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어리석고 답답했다. 그러나 어리석었기에 그의 삶이 아름다웠음을 우리는 안다. 바삐 흘러가고 있는 이 세상에도 어리석은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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