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점이 아닌, 나의 결에 한 점으로
O, A, B, AB로 성격을 수혈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4배 더 정밀해진 FHD의 MBTI로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일일이 겪어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개요 정도는 빠르게 받아볼 수 있는 게 참 편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나를 벗어나 이론이 말해주는 나, 비교적 객관적인 주관성으로 스스로를 알 수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몇 년을 한결같은 조각을 받아보며, 16조각 중 나에게 돌아온 그 조각은 영원히 그 조각으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조각으로 변해있었다. T를 기피하던 F가 T가 되어버린 사건이다. 아니, T로 커버린 F의 성장기다.
감성 사이에 나를 넣으면 그게 감수(민)성이였고, 감성을 빼면 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봐온 주변 사람들에게 F가 T가 되어버린 이 사건, T로 커버린 나의 성장기는 반전스릴러 마냥 예측할 수 없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사건과 성장기의 주인공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전개임에 분명하다. 그나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에서의 우선순위가 연애에서 일로 디졸브 되던 순간이 F에서 T로 넘어가는 시점과 어느 정도 중첩된다는 것이다. 연애에 일희일비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감정적일 수가 없었다. 눈물 하나를 쏟아도 밀도 높은 눈물을 쏟았고, 미소 한 번을 띠어도 농도 짙은 미소를 띠우곤 했다. 그런데 감정을 그렇게나 많이 소비했는데 돌아오는 건 없었다. 소비만 하니 정작 내 마음은 빈 지갑처럼 텅텅 비어갔고, 힘들 때마다 힘이 가해지지 않았다. 연애가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만큼 연애에 소비한 감정들에 휩쓸린 결과였다.
약 3년 동안 이어진 사랑의 과소비를 끊어낼 즈음, 사회에서의 나는 많이 바빠졌다. 사회생활의 쓴맛을 틈틈이 맛보며, 성과의 단맛도 알아버렸다. 나는 나의 일과 직업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기도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사랑은 나에게 가장 ‘사’의 영역이었다면, 사회생활은 유일하면서도 가장 ’공‘의 영역이었다. 일이라는 건 자고로 잘해야만 하는 영역이라 생각했기에, 일을 잘하기 위해선 자잘한 감정 따위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안 됐다. 적어도 내가 내세운 ’일 잘하는 방법‘엔 ’감정‘의 요소가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1년, 2년… 나의 사회생활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적어도 회사에서의 나는 온전하고도 완벽한 T가 되어버렸다. 물리적으로도 연애하고 여행하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현저히 많았고, 가족이나 친구들보다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회사에서의 내가 곧, 그냥 내가 되었다. T로 완전히 페이드인 된 것이다. 일이 삶에서 소중해지면서 감정에서 이성으로 막이 전환되었다.
“너 T야?” 나는 이제 화난 남자친구를 달래주기보다, 그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여자친구가 되었다. T 여자친구 역할은 내 인생에 영영 없을 줄 알았는데, 언젠가 나에게 주어진 <T의 사랑> 1편의 시작이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떼를 쓰는 게 더 납득될 것 같다는 F 남자친구의 말에 철저히 반박하고 나서는 이성적인 T 여자친구가 나였다. 사실 내가 이렇게 커버리고 마주한 모든 상황들은 나에게도 처음이었기에, 과거와의 괴리감으로 이러한 변화를 부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과거에 기피하던 반대가 되어보니 비로소, 그 어느 하나 명백한 결점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T가 되었다는 건 -의 변화가 아니며, 그렇다고 +의 변화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과거의 나도 내가 맞았고 지금의 나도 나인 것이다.
사랑이 중요했던 F는 일이 중요한 T가 되었고, 전혀 다른 태도와 생각으로 새로운 사랑 앞에 서있다. 감정의 과도한 수요가 끊기고 이성과 논리가 공급되는 연애는 어떨까, 괜히 궁금하기도 하고 오히려 씩씩하다. 일희일비하며 감정 소비만 하던 사랑 말고, 하나의 슬픔과 하나의 기쁨마저도 과도한 수요 없이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 수요와 공급이 적절히 이루어지는 균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F 남자친구가 감정이 적어진 T 여자친구로 인해 본인의 감정을 더욱 소비할 일도 생겨선 안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 바뀐 내가 새롭게 노력해야 할 일이다.
결국 이 변화가 나의 결점이 아닌 나의 결에 한 점으로 오롯이 남길 바라며,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