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모델 활동을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는 어느새 나도모르게 현장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익숙한 분위기, 자주 만나는 촬영팀, 친한 모델들, 그리고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비슷한 콘티로 반복되는 촬영들… 설렘보다는 약간의 지루함이 생겼었다.
그렇지만 늘 광고에서 보여지는 신뢰감있고 좋은 이미지가 있다보니, 당시 주변 지인들과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너 연기형 얼굴이야. 연기 한번 해보지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자꾸 듣다 보니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쉽게 웃고 이미지만으로 충분한 수입을 얻던 그때까지는 연기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해야지’라는 막연한 생각만 품은 채 현실에 안주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가전 광고 콘티 미팅을 갔는데 대사 한두 마디를 주며 이걸 다양한 버전으로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연기에 대한 기초 개념도 없고 대사를 해 보는 일도 거의 없었기에 대사 한두 마디를 가지고 다양하게 표현 하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거 그냥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고 대사를 느낀대로 툭 내뱉었는데, 그 콘티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말을 하다 보니 그야말로 발연기라는게 나와버렸다. 다양하게 달라는 요청도 있었는데 여러가지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한번의 대사 만으로도 너무 손이 오그라 들었다. 너무 창피했다. 나름 광고에이전시 디렉터분들께 광고모델로 신뢰감을 쌓은 상태였는데, 막상 연기가 안 되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게 내 한계처럼 느껴졌다.
그 날 이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더 오래 하고 싶다면, 나도 표현을 더 잘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연기를 배우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내 안에서 연기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 조심스럽고 조용하지만 깊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그게 내가 연기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첫 계기였다.
그리고는 아이 낳은 후에야 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연기를 배운다는 거창한 느낌 보다는 편하게 연기를 대하고 싶었다. 부담 없이 해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연기 수업에 마실 간다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다녔던 것 같다. 그 시간만큼은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을 꺼내놓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하루는 웃음 의자, 화내는 의자, 슬픔 의자 세 개를 두고 그 의자에 앉으면 그 감정만 할 수 있는 훈련을 한 날이 있었다. 과연 그게 될까 싶었는데 집중해서 선생님 디렉팅에 맞게 웃음 의자 라고 하면 웃음 의자에 앉아서 기뻤던 일을 생각했다. 재밌는 일을 상상하면서 실실 웃기도 했다. 화내는 의자에서는 화를 냈다. 슬픔의자에서는 정말 슬펐던 일을 생각하며 펑펑 울었다. 연기할때은 그 연기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게 포인트 였던 수업이었는데, 수업 내용을 떠나서 선생님도 내가 우는 의자에서 우는 연기 할때는 자기도 너무 짠했다고 하시며 공감해주셨다.
슬프면 슬픔을, 기쁘면 기쁨을, 화가 나면 분노를 있는 그대로 내보인 시간… 어쩌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감정 표현을 뒤늦게 경험한 것이었다.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다 보니, 마음의 치유가 됨을 경험했다. ‘감정 힐링 연기 수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감정을 꺼내고, 표현하고, 정리하면서 처음 느껴보는 희열이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감정답게 표현하는 일은 나에겐 처음이었다.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선 억지 감정이 아니라, 진짜 감정의 결을 따라가야 했다. 그리고 그건 결국,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물론 연기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기술이나 스킬은 부족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깊이, 대사에 감정을 실어 전하는 능력,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감각 등 모든 게 생소하고 서툴렀지만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이 오히려 즐거웠다. 그렇기 연기라는 것의 매력에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