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업은 비서였다. 늘 상사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직업. 휴대폰이 꺼지면 불안했고, 퇴근 후에도 문자연락이나 전화 연락 하나에 가슴이 철렁했다. 성격이 빠릿하고 실수를 잘 하지않는 완벽주의자 성격 덕분에 나름 일잘하는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그 삶을 계속 이어가기엔 너무 무리가 있었다. 24시간 상사의 스케줄과 업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비서일을 계속하며 가정생활과 내 개인의 삶을 온전히 영위하기에는 내가 너무 버거울것같았다. 그래서 결혼식 날짜를 잡고 퇴사를 결정했다.
그치만 문득 찾아올 공백이 무서웠다.
‘나 이제 뭐하지?’
그래서 선택한 건 대학원 진학이었다.
못다 한 공부는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성적도 나쁘지않았다. 논문으로 국가연구장학금까지 받았고, 졸업 후에는 운 좋게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강단에서 보낸 몇 년. 어느 특강을 준비하던 중 필요해서 강사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을 찾았다.
그 당시에는 어떤 촬영을 원하는지 미리 작가와 만나서 이야기하는 미팅도 있었는데, 컨셉미팅 겸 테스트 촬영을 한뒤 포토그래퍼가 내게 말했다. “주부 모델 해보시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주부모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나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웃겼다. “아하하하 모델은 모델이지, 주부 모델은 뭐에요?” 첨듣는 주부 모델이란 말에 우습기도했지만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작가님은 벽 한쪽에 붙여놓은 사진들을 가리키며 이런 컨셉으로 찍어서 광고도 찍고 모델로 활동하는 분들이 있다며 알려주었다. “오, 그래요?” 하면서 묘하게 그 일이 궁금해졌다. 늘 직업에 호기심 많은 나는 오히려 ‘한번 해볼까’싶은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 본 촬영을 했고, 원래 필요로 했던 강사프로필을 찍으며, 포토그래퍼의 말대로 주부모델 프로필 컨셉을 더해서 찍었다. 그리고는 일상으로 돌아와 작가가 알려준 대로 광고에이전시에 메일을 보냈다. 솔직히 별 기대는 안 했다. 강의 다니느라 바빠서 메일을 어디에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정말 연락이 왔다. 촬영을 한 번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현장에 나가보니 카메라, 조명, PD 등 평소 접할수 없었던 직군의 분들을 만나며 신기했고 긴장 반, 설렘 반. 그렇게 내 인생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다년간 비서생활하며 쌓인 눈치로 하라는대로 했다. 현장엔 활기가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에너지가 좋았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이거다. 이게 내가 좋아할만한 일인것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보다 훨씬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일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았다. 그날 이후, 나는 점점 강의를 줄이고 광고 촬영을 늘려갔다. 현장에 나가면 새로운 모델들을 알게되고, 또 새로운 정보를 듣고 배워가며 일을 알아갔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일이 계속 들어왔다. 제법 바쁜 모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걸로 평생 살아갈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일반인이지만 tvcf에 자주 등장하며 연예인들과 나란히 일을 하고, 바이럴광고, 홍보영상 등 영상촬영에 두루두루 쓰였다. 처음엔 그저 이미지성으로 잘웃고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면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감독님들의 다양한 디렉션에 맞춰 해야하는 광고연기도 쉬운일은 아니기도 하고, 밤샘이나 새벽에 끝나는일도 많아서 나름대로 고충이 따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서일, 강의일 하던것에 비해 스케줄도 내가 원하는대로 짤수있으니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삶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수입이 꽤 좋다보니 만족하며 지냈다. 우연히 강사프로필 찍다가 허게 된 일이었는데 이게 내 본업이 될 줄은 꿈레도 몰랐다. 내 인생에서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순간,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고 서른일곱에 느지막히 임신을 확인한 날 모든일을 그만두었다. 아기를 지키고 싶어서 이미 픽스된 예정된 촬영건은 모두 취소하고 임신유지를 1순위로 한채 공백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일반인 광고모델로의 나름의 전성기는 일단 끝이났다.